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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70호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訓民正音)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업적 훈민정음(한글) 창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이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많은 답변이 나올 수 있지만,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답변할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역사와 정신문화가 중국과 일본에 의해 왜곡 조작되었고, 일제가 영구적인 식민통치 목적으로 조작해 만든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지 않은 채 그대로 가르치고 있는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파렴치한 만행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정체성은 어둠에 갇힌 채 아직도 광복(光復)하지 못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통치 기간 내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수없이 저질렀습니다.

우리의 말과 한글도 없앴고, 무엇보다 역사를 왜곡 조작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없애버렸다는 점입니다.

 

 

 

요즘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단순히 '우리 것'이라는 말만 해도 '국뽕'으로 취급받는 세상입니다.

일제 식민주의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대한민국 식민사학 카르텔에서 재야사학을 공격하기 위해 급조한 천박한 말이 '국뽕'입니다.

 

 

 

 

 

 

 

 

 

 

 

조선 4대 왕 세종대왕 이도 -훈민정음 한글 창제

http://gdlsg.tistory.com/1523

 

 

 

근세조선 27명의 임금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추앙받고 있는 분은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대왕입니다.

백성을 위한 애민정신, 끊임없는 자기계발, 문명화된 조선, 문화가 발달한 조선, 조선의 미래를 위해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등 세종대왕의 업적은 너무 많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훈민정음(한글)은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이지만, 세종대왕 한 사람의 창작물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조선 초기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개인으로서는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을 위해 세종대왕의 업적이 많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 중에서도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단연 한글입니다.

 

 

한글 창제 당시에 많은 난관이 있었고 그 후로도 수백 년 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았지만, 이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에는 세종대왕을 비롯해 정인지와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의 글을 모두 들어 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크게 의편(例義篇)와 해례편(解例篇)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직접 쓴 예의편(例義篇)세종대왕께서 한글의 창제 목적과 한글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서입니다.

해례편(解例篇) 서문은 정인지가 지었으며 훈민정음, 곧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창제 원리와 한글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사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며 훈민정음 창제 당시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들이 쓴 글입니다.

 

 

세종대왕의 대표적인 업적인 훈민정음(한글)은 세종 25년(1443년) 12월 30일에 창제됐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훈민정음 반포 시기를 세종 28년(서력 1446년)이라고 합니다.

 

 

훈민정음(한글)의 정확한 반포 날짜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실록에 '이달에'라는 기록만 있습니다.

10월 9일 현재의 한글날은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통 11년 9월 상한'을 훈민정음 반포일로 추정하여 음력을 양력으로 계산하는 복잡한 과정 끝에 정해졌습니다. '정통 11년'은 명나라 6대 황제 정통제(正統帝, 재위 1435~1449)의 연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中 - 1443년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 중성(中聲) 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 속된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전부터 많은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반대파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입니다.

 

훈민정음 반포 2년 전 세종 26년(144년) 최만리가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습니다.

최만리가 세종대왕께 상소할 때 훈민정음(한글)이 옛 글자를 본뜬 모방한 글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20일 中 -1444년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中 - 1446년

(예조판서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中)

 

이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

'........ 계해년(세종 25년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音)은 칠조(七調, 궁상각치우 변치 변궁)에 합하여 삼극(三極, 천지인)의 뜻과 이기(二氣, 음양)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로써 전환하여 다함이 없이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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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8.10.07 06: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위대하신 분이지요.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휴일 되세요^^

  2. kangdante 2018.10.07 07: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만의 한글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고 자랑스럽습니다
    세종대왕은 그래서 더욱 위대한 성군입니다

  3. 죽풍 2018.10.07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훈민정음 제정으로 지금 우리가 편한 소통을 하는 것이겠죠.
    잘 보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

  4. 버블프라이스 2018.10.08 0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종대왕.. 정말 위대하신 분이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제4대 왕 세종대왕 이도의 한글 창제, 세종 25년(1443) 음력 12월 30일의 한글 창제일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10일(양력 10월 9일) 훈민정음 반포의 한글날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념하여 제정된 한글날은 실제 훈민정음 반포일은 아니다.

한글날이 훈민정음 반포일로 지정되는 과정은 다소 복잡하며,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훈민정음 반포는 다르다.

 

 

일제강점기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기념하기 위해 민간단체가 정한 한글날은 일차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훈민정음 반포 날짜를 추정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한글 창제는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서력 1443, 계해년)년 12월 30일(경술)에 '상친제언문이십팔자(上親制諺文二十八字,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라는 기록과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서력 1446, 병인년) 음력 9월 29일에 임금(세종대왕)께서 직접 쓴 글, 즉 '어제(御製)와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이란 기록을 토대로 정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의 '훈민정음성(訓民正音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과 '어제왈(御製曰, 임금께서 지은 글에 이르기를)', 그리고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의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 양력 11월 4일에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던 순수 민간단체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의 전신)가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반포(1446년 음력 9월 29일, 갑오일)한 기념일이라고 '가갸날'이란 이름으로 최초의 한글날을 처음 정하게 된다.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해 정한 '가갸날'은 1927년 조선어연구회 기관지 한글이 창간되면서 '한글날'과 '가갸날'이 혼용되어 사용된다.

 

 

 

일제강점기 민간이 자체적으로 지정한 날이다 보니 다수의 의견에 따라 음력 9월 29일을 양력(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여 양력 10월 29일이 훈민정음 반포일로 정한다. 그리고 다시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양력 10월 28일이 한글날이 된다.

 

서양은 1582년부터 오차 발생의 율리우스력(한글 창제와 훈민정음 반포 당시 역법)을 폐지하고 그레고리력을 사용했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이 발견되면서 다시 한글날 날짜가 조정된다.

'세종 28년 9월 상한(上澣)'이라는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 내용이 근거로 9월 상순이 끝나는 음력 9월 10일을 다시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바꾸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라는 순수 민간 한글 연구단체가 지정한 한글날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으로 공휴일로 지정됐다. 이후 정권에 따라 법정 공휴일, 일반기념일, 국경일 등으로 바뀌었다.  

 

 

 

명칭과 기념 일자는 다르지만, 북한에도 한글날이 있다.

북한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일이 아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기념하여 양력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부르고 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여 정해진 한글날은 음력 9월 29일 → 양력 10월 29일 → 양력 10월 28일 양력 10월 9일(음력 9월 10일)로 우여곡절의 제정 과정을 거치게 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세종대왕의 한글과 고조선 가림토 문자 

http://gdlsg.tistory.com/809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경술(庚戌)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9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이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일렀다.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甲午)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 中)

"계해년(세종 25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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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7.10.08 06: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종대왕 한글날의 관해 잘 보고 가네요

  2. 버블프라이스 2017.10.08 18: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일 한글날 이전에
    '세종대왕 한글 창제와 훈민정음 반포 한글날'과 관련하여 좋은글을 작성해주셨네요^^
    잘보고 갑니다.

  3. 죽풍 2017.10.09 2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글이 세계에서 최고 우수하다고 하죠.
    잘 보고 갑니다. ^^

위대한 성군(聖君) 세종대왕의 업적 - 민본(民本) 애민(愛民) 위민(爲民)의 사상과 정신과 정치

 

 

 

 

 

 

 

 

 

 

 

 

 

 

 

세종대왕은 정조대왕과 함께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이며,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룬 임금이다.

태종 이방원은 세종대왕이 훈구세력과 외척세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강력한 왕권으로 탄탄하게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애민과 위민의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비록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태평성대의 기반 확립해 주기도 했지만, 세종대왕은 남달랐다.

 

 

 

세종대왕은 태평성대를 열어가는 임금이 갖추어야 할 덕목인 탁월한 안목, 뛰어난 지혜와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하여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종대왕은 민본사상을 바탕에 두고 임금으로서 인(仁)과 덕(德)을 갖추고,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을 위해 애민정신과 위민정신으로 정치를 펼쳐 나가는 것이 참다운 군주가 나아가야 할 임금의 길(王道政治)이라 생각했다.

 

 

 

 

 

 

 

 

 

 

 

 

 

 

세종대왕은 탁월한 지도력으로 자질과 능력이 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부서의 특성에 맞는 인재를 배치하여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쌓은 성군이다.

 

세종대왕은 성리학 이념의 민본사상(民本思想)을 바탕으로 애민(愛民政治)정신으로 위민정치(爲民政治)를 구현하며 32년 동안 많은 업적을 이루어 나갔다. 세종대왕의 애민과 위민의 정신과 정치는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므로 백성이 삶이 편안해국가가 안정된다는 민본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다.

 

 

 

민본사상은 유학의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이다.

민유방본 본고방녕(民惟邦本 本固邦寧),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니,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나라의 근본으로서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하는 것임을 말한다.

 

세종대왕의 민본사상은 나라와 백성은 하나의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동일체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세상에 드러난 치적보다 백성과 임금과 나라는 하나라고 생각한 그 마음일 것이다.

 

 

 

 

 

 

 

 

 

 

 

 

 

세종대왕의 수많은 업적의 기저에는 민본과 애민과 위민의 사상과 정치철학이 깔렸다.

세종대왕의 민본사상은 백성이 시간과 날씨, 계절의 변화를 더 자세히 알아 농사짓는 일에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선진화된 기술과 농사법 등을 보급하면서 백성의 삶을 질적이고 양적으로 변화시켜나갔다.

 

 

김종서, 최윤, 이종무 등을 중심으로 국방을 정비하였고, 집현전 학사와 함께 훈민정음을 반포와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정초, 이순지, 김담, 장영실 등이 주축이 되어 천문기기 개발과법 개정하였고, 정초는 백성의 삶과 직결된 농업설명서 『농사직설』을 편찬하였다.

 

맹사성과 박연을 중심으로 향악과 아악 등 예악을 정비하였고, 법제 정비와 함께 공평하고 부정부패를 없애는 조세정책과 이를 위해 『세종실록지리지』 등을 편찬하기도 했다.

 

 

 

 

 

세종대왕의적 중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훈민정음 서문에는 민본사상을 실천한 세종대왕 애민(愛民)과 위민(爲民)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나라의이 중국과 서로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어도 마침내 제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가엾이 여기어 새로 28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세종대왕은 세속적인 찬양을 듣기 위해 업적을 쌓지 않았다. 

백성과 함께 울고 웃는 진정한 군사부(君師父)의 길, 그런 임금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였다. 

근현대 사회는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세속적 명리(名利), 그 신기루를 쫓는 권력자가 판을 치고 있다.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2월 12일(1419년)

"백성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요즈음 수한풍박(水旱風雹)의 재앙으로 말미암아, 해마다 흉년이 들어 환독(鰥寡孤獨)과 궁핍한 자가 먼저 그 고통을 받으며, 떳떳한 산업을 지닌 백성까지도 역시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하였다.

 

호조에 명령하여 창고를 열어 구제하게 하고, 연달아 지인을 보내어 나누어 다니면서 고찰하게 한바 수령으로서 백성의 쓰라림을 돌아보지 않는 자도 간혹 있으므로, 이미 유사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슬프다, 한 많은 백성이 굶어 죽게 된 형상은 부덕한 나로서 두루 알 수 없으니, 감사나 수령으로 무릇 백성과 가까운 관원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말고 한결같이 그 경내의 백성으로 하여금 굶주려 처소를 잃어버리지 않게 유의할 것이며, 궁벽한 촌락까지도 친히 다니며 살피어 힘껏 구제하도록 하라.

 

나는 장차 다시 조정의 관원을 파견하여, 그에 대한 행정 상황을 조사할 것이며, 만약 한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이 모두 교서를 위반한 것으로써 죄를 논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 7월 3일(1423년)

왕지(王旨)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생민의 주가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무수(撫綏)하는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백성에게 친근한 관원을 신중히 선택하고 출척하는 법을 거듭 단속하였는데도....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 7월 13일(1423년)

사직(社稷)의 기우제 제문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먹을 것이 백성에게 가장 소중하니, 진실로 그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면 나라가 무엇을 의뢰하겠습니까. 아아, 나 조그만 사람이 큰 왕업을 외람되이 계승하게 되니....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2월 22일(1425년)

"수령의 임무는 지중(至重)하다. 그런 까닭에 뽑고 가려서 명령하는 것이다.

내가 백성의 일에 대하여 친히 볼 수 없으므로 그대들을 보내어 명령하는 것이니, 수령의 임무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오늘의 가르침을 잊지 말고 힘써 하여라."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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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7.01.11 06: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종대왕 이야기 잘 보고 가네요

  2. 생명마루 신림점 2017.01.11 1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정말 대단한 위인이시죠

  3. 죽풍 2017.01.11 14: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본, 애민, 위민정치는 백성들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는 기본적인 정신이라는 생각입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4. 고프다 2017.01.11 2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세종대왕의 종묘제례악과 3대 악성(樂聖) 아악(雅樂)의 난계(蘭溪) 박연(朴堧)

 

 

 

 

 

 

 

 

 

 

 

 

 

 

 

조선왕조에서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은 하늘이 낸 임금인지 주변에는 학문, 천문, 기술, 군사,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출중한 능력을 지닌 인재가 넘쳐났다.

 

 

 

세종대왕은 문화정책의 근간으로 예악(禮樂)의 기틀을 세웠고, 예악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는 한편 통치철학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예악 정형(禮樂政刑)은 국가(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경영이론으로 예악을 바탕으로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지금도 종묘에서 연주되는 종묘제례악은 세종대왕이 만든 음악이다.

 

 

 

하늘의 도(道, 천도天道)는 사람(인도人道)에 의해 세상의 문화로 드러난다.

유도(儒道, 유교)는 하늘(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근거와 천도(天道)를 밝히는 수단으로서 예악(禮樂)을 중시했다.

예(禮)는 질서요, 악(樂)은 조화이며 하나 됨이다. 예악은 천지(天道)와 인간(人道)의 질서이며 조화다.

예악이 형식적이거나 지나치면 질서가 무너지고 조화가 깨져 허례와 허식이 된다.

 

 

 

 

 

 

 

 

 

 

 

 

 

조선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진 세종대왕(1397~1450)의 옆에는 문화의 음악분야에서도 향악(鄕樂)의 맹사성(1360~1438)과 함께 아악(雅樂)을 정비하여 우리 민족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리는 난계 박연(1378~1458)이 있었다.

 

 

세종대왕은 향악의 맹사성과 아악의 박연에 못지않은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과 우리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대왕 재위 때까지도 조선은 우리의 향악(鄕樂), 당나라 당악(唐樂), 송나라 아악(雅樂)이 혼재되어 있었다.

 

 

 

세종대왕의 예악 정치를 펼칠 때 우리의 음악을 주장하는 고불 맹사성과 아악을 주장하는 박연이 대립했다.

아악은 고려 예종 때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고려와 조선 초기 왕실에서 사용한 중국음악이다.

 

 

3대 악성으로 불리는 박연은 고려 우왕 4년(1378년) 충청도 영동에서 태어났다.

태종 때 대과에 합격하여 조정에 출사하였다.

 

1424년(세종 6)에 박연을 악학별좌에 임명되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세종대왕에게 악기와 음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조선의 음악과 악기를 만드는 방안을 건의 올린다.

  

 

 

 

 

 

 

 

 

 

 

 

세종대왕의 신뢰와 지원으로 박연은 편경과 율관 제작, 아악(雅樂) 등을 정비하고 신악(新樂)을 만들었다.

박연은 악기도감 등에서 여러 악기를 제작하였고, 조회악, 회례악, 제향악 등 아악 정비와 제정을 하였다.

 

 

세종대왕은 박연이 조정의 관리로서 공적 임무를 수행할 때 잘못을 하면 용서하지 않았다.

박연이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신분증(부함)을 잃어버린 실수와 누이의 장례 때 사적인 일에 아랫사람을 동원하자 두 차례 모두 관직을 삭탈하였다.

 

 

 

세종대왕의 명으로 아악을 완성한 우리 민족의 3대 악성 난계 박연의 말년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집현전 학사로 있던 박연의 셋째 아들 박계우가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죽었다.

 

계유정난 때 희생된 사람은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억울하게 역모죄로 죽었다.

본래 역모사건은 삼족을 멸하지만, 수양대군은 할아버지 태종, 아버지 세종대왕과 문종, 단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음악을 만드는데 공을 쌓은 박연을 연좌시키지 않았다.

 

 

80 가까이 된 나이에 현직에 있던 박연은 수양대군이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아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삭탈관직 되어 유배 갔고,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악을 정비한 난계 박연은 세종대왕이 총애한 인물이며 그의 마지막 관직은 예문관 대제학(정 2품)이었다. 

 

 

 

 

 

 

 

 

 

 

 

 

세종대왕은 맹사성의 향악과 박연의 아악, 그리고 당악을 융합한 우리의 궁중음악을 만들었다.

세종대왕은 여민락(與民樂), 보태평(保太平), 정대업(正大業) 등의 음악을 직접 만들었다.

 

용비어천가를 작곡한 여민락은 임금이 거둥할 때 연주되었고, 보태평과 정대업은 종묘제례악이 되었다.

종묘제례악은 세종대왕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탄생한 작품으로 세조 때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어 사용되고 있다.

 

 

 

 

세종대왕이 음악을 정비하기 전까지 공자의 사당에서 연주되는 문묘제례악은 아악(雅樂), 역대 임금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종묘에서 연주되는 종묘제례악은 향악(鄕樂)과 당악으로 연주되었다.

 

 

세종대왕의 명으로 국가의 기본예식인 가례(嘉禮, 왕실 경사), 군례(軍禮, 군사 훈련), 길례(吉禮, 국가 제사), 빈례(賓禮, 외국사신 접대), 흉례(凶禮, 장례)를 정비하였고, 성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체계가 완성됐다.

 

 

 

종묘(宗廟)에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과 영녕전에서 왕실의 제사를 모시는 것이 종묘대제(宗廟大祭)다.

사직단(社稷壇)에서는 토지(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가 행해지는 곳으로 사직대제(社稷大祭)라 한다.

종묘대제와 사직대제는 길례(吉禮)에 해당한다.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9월 11일(1430년)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아악은 본시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하물며 아악은 중국 역대의 제작이 서로 같지 않고, 황종의 소리도 또한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아 아악의 법도는 중국도 확정을 보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송나라의 악기도 또한 정당한 것은 아니며, '악공 황식이 조정에 들어와 아악을 연주하는 소리를 들으니, 장적, 비파, 장고 등을 사이로 넣어 가며 당상에서 연주했다.' 하였으니, 중국에서도 또한 향악을 섞어 썼던 것이다."

 

 

 

 

세종실록 27권, 세종 7년 2월 24일(1425년)

예조에서 악학별좌 박연의 수본에 따라 계하기를

"음악의 격조가 경전, 사기 등에 산재하여 있어서 상고하여 보기가 어렵고, 또 문헌통고, 진씨악서, 두씨통전, 주례악서 등을 사장한 자가 없어서, 비록 뜻을 둔 선비가 있더라도 얻어 보기가 어려우니, 진실로 악률이 이내 폐절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문신 1인을 본 악학에 더 설정하여 악서를 찬집하게 하고, 또 향악, 당악, 아악의 율조를 상고하여, 그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어, 한 질은 대내에 들여가고, 본조와 봉상시와 악학 관습도감과 아악서에도 각기 1질씩 수장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 4월 25일(1426년)

봉상판관 박연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주례의 춘관 태사가 육률과 육동을 관장하여 음양의 소리를 합하였는데....

그윽이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의 제향 때의 음악은 모두 조나라의 제도를 근거한 것인데, 다만 상실(詳悉)하지 못할 뿐입니다.

 

종묘의 음악은 본래 주나라 제도의 무역(無射)을 연주하고 협종(夾鐘)을 노래하여 선조에 제향한다는 글에 따랐는데....

 

마땅히 협종을 노래해야 할 것인데도 도리어 무역을 연주하게 되어, 무역만이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음악인 줄만 알고 협종이 무역과 합하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여, 당상과 당하에 모두 무역을 사용하여, 모두 양성(陽聲)을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종묘의 음악이 심히 정세하고 당연하지 못한 것이며, 사직의 음악은 본래 주나라 제도의 태주(對)를 연주하고 응종(應鐘)을 노래하여 지지(地祗)에 제사지낸다는 글에 따른 것인데....

 

 

마땅히 응종을 노래해야 할 것인데도 도리어 태주를 연주하게 되어, 태주만이 사직에 제사지내는 음악인 줄만 알고, 응종이 태주와 합하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여, 한 제사에 순전히 태주만 사용하고 순전히 양률(陽律)만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사직의 음악이 심히 정세하고 당연하지 못한 것이며....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9월 4일(1427년)

악기(樂器)는 박연에게 맡긴다면 성음(聲音)의 절주(節奏)는 거의 될 것이다.

 

 

 

세종실록 39권, 세종 10년 2월 20일(1428년)

임금이 대언이 계사한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박연은 세상 일에 통하지 아니한 학자가 아니라 세상 일에 통달한 학자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8월 18일(1430년)

사정전으로 거둥하여 아악(雅樂)과 사청성(四淸聲)을 감상하였다.

이는 박연이 새로 만든 종(鐘), 경(磬)들이었다.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3월 22일(1433년)

상호군 박연이 제악(祭樂)에 쓰는 관복(冠服)의 제도를 올렸다....

 

 

 

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 12월 10일(1449년)

"이제 그대들에게 신악(新樂)을 내리니 마땅히 즐기라."

 

12월 11일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이제 신악이 비록 아악에 쓰이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조종의 공덕을 형용하였으니 폐할 수 없다.

의정부와 관습도감에서 함께 이를 관찰하여 그 가부를 말하면, 내가 마땅히 손익하겠다." 하였다.

 

 

 

세조실록 32권, 세조 10년 1월 14일(1464년)

임금이 종묘에 친히 제사하였는데, 새로 만든 정대업·보태평(종묘제례악)의 음악을 연주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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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7.01.09 07: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가네요...한주 시작 잘 하세요

  2. 고프다 2017.01.09 17: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너무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왕조 최초의 국문(國文) 시가(詩歌) 세종대왕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태조 이성계가 창업한 조선왕조 27명의 임금 중 세종대왕은 가장 위대한 성군이라는데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위대한 성군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훈민정음을 반포하여 백성에게 글을 알 수 있게 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국방, 과학, 문화, 사회, 경제, 농경 등 가장 하층계급이었던 노비에서부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정승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모든 백성을 위해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세종대왕의 명으로 1442년(세종 24)부터 1445년까지 3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의 실용성과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종대왕은 용비어천가를 신하들이 지어 올리게 하기 위하여 표면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태조 이성계가 1380년 왜구를 물리친 업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함이라 하였다.

 

 

 

1380년(고려 우왕 6) 왜구가 내륙을 약탈하려고 1백여 척의 배에 약 5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금강하구(군산, 장항)에 상륙하였다. 이때 이성계는 고려의 병마도원수로 왜구를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을 이끌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약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쳐들어온 것과 비교하면, 200년 전의 5만 명의 왜구는 대군이다.

1380년의 진포해전은 단순한 노략질이 아닌 고려와 왜구의 전쟁상황이라고 봐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세종대왕의 명으로 만들어진 용비어천가는 10권 5책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왕조 건국의 정통성과 공정왕(조선 2대 임금 정종)을 빼고,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 여섯 임금을 업적과 덕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는 찬양의 노래다.

 

 

조선의 세종대왕이 아니더라도 고려, 고구려 등의 나라에서 국가와 임금의 정통성,대 임금을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글은 얼마든지 지을 수 있다. 조선의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의 명령으로 만들어졌고, 최초의 국문 시가로서의 가치도 있는 용비어천가지만, 다소 과장된 부분도 있다.

 

 

 

혹자는 세종대왕에게 올린 용비어천가를 중화를 받드는 사대(事大)의 글, 임금에게 아부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 무문곡필(舞文曲筆)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념과 사상, 특히 정치에서 권력에 아부하는 글이나 모양새를 보고 용비어천가를 빗대어 말하는 예 있다.

 

 

 

 

 

해동성국의 여섯 용이 날아(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하늘이 내려주신 복이시니 옛 성인과 같으시니

(용비어천가 제1장)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려 꽃은 좋고 열매가 많으며,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고, 시내를 이뤄 바다로 간다.

(용비어천가 제2장)

 

주국의 대왕은 빈곡에서 제업을 열었고, 우리의 시조께서는 경흥에서 왕업을 여셨다.

(용비어천가 제3장)

 

천세 전에 미리 정하신 한강 북쪽에 어진 덕을 쌓아 나라를 여시고, 왕조의 운명이 끝이 없다.

(용비어천가 제125장 中)

 

 

 

 

 

 

 

 

 

 

 

 

 

 

『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3월 1일(1442년)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홍무 13년(고려 우왕 6, 1380년) 9월에 왜구가 떼를 지어 육지로 올라와 우리의 경계를 침략하였을 때에, 우리 태조께서 부오를 정비하여 이끌고서 바로 운봉에 이르러 한번에 소탕하였으니, 그 훌륭한 공(功)과 위대한 업적은 후세에까지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때의 군마의 수효와 적을 제어한 방책과 접전한 수와 적을 함락시킨 광경 등을 반드시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니,

경은 도내 여러 고을에 산재하여 사는 늙은이들에게 널리 다니며 방문하여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고자 하여 이러한 전지를 내린 것이다.

 

 

 

『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 4월 5일(1445년)

의정부 우찬성 권제, 우참찬 정인지, 공조참판 안지 등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0권을 올렸다.

"어진 덕을 세상에 널리 베푸시고 큰 복조를 성하게 열으시매, 공(功)을 찬술하고 사실을 기록하여 가장(歌章)에 폄이 마땅하오니 이에 거친 글을 편찬하와 예감(睿鑑)에 상달하옵니다....

 

천지를 그림하고 일월을 본뜨오니 비록 그 형용을 다하지 못하였사오나, 금석에 새기고 관현에 입히면 빛나는 공을 조금 드날림이 있을 것이옵니다. 만약 살피어 등이시고 드디어 펴 행하사,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큰 업이 쉽지 아니함을 알게 하시고, 시골에서 쓰고 나라에서 써서 영세에 이르도록 잊기 어렵게 하소서, 편찬한 시가(詩歌)는 총 1백 25장(章)이온데, 삼가 쓰고 장황(裝潢)하여 전(篆)을 아뢰옵니다." 하니

판에 새겨 발행하기를 명하였다.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5월 5일(1447년)

예조에서 좋은 술 50병과 소, 양, 기러기, 오리 등 물건을 진상하니, 임금이 강녕전에 나와 창기(倡妓)와 재인(才人)으로 하여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연주하게 하였는데,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관현악(管絃樂)으로만 하고, 노래는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10월 16일(1447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5백 50본을 군신(群臣)에게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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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인재 등용과 양성, 최고의 인재(人材) 집단 집현전(集賢殿)

 

 

 

 

 

 

 

 

 

 

 

 

 

고려는 연영전(延英殿)을 두어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고 학문 연구를 하였다.

고려 17대 황제 인종(1109~1146, 재위 1122~1146)에 이르러 연영전을 집현전(集賢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건국 초기는 건국 공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고려 출신 성리학자도 많았고 집현전도 있었지만, 유명무실하였다.

세종대왕은 최고의 인재집단이 모인 집현전을 학문연구를 넘어 백성의 질적이고 양적인 삶을 향상하며, 조선의 미래를 열어가는 국정운영의 산실로 만들었다.

 

 

 

 

조선 2대 왕 정종 1년(1399) 3월 대사헌 조박이 임금께 집현전을 활성화할 것을 건의하였다.

정종 2년(1400) 1월에 집현전을 보문각(寶文閣)으로 고쳤다.

 

 

태종 17년(1417) 사간원에서 치도(治道)에 대한 몇 가지 건의 중에 유명무실한 현전을 개편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흐지부지되었다.

 

1419년 좌의정 박은이 집현전을 활성화하여 인재를 발굴하자는 방안을 올리자 세종대왕은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후 집현전 활성화 방안에 대한 후속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420년 세종대왕이 직접 나서서 집현전을 명실공히 최고의 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하는 최고의 인재집단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미래를 위해 학문연구, 인재양성과 등용, 서적 편찬, 왕의 자문기관으로서 최고의 인재집단 집현전을 만든다.

집현전 최고직인 영전사는 정 1품 2명, 대제학은 정 2품 2명, 제학은 종 2품 2명, 부제학은 정3품 1명 등 최고위 정1품에서 최하위 정 9품까지 폭넓고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다.

 

 

 

 

 

 

 

 

 

 

 

 

 

세종대왕은 최초의 집현전 수장으로 좌의정 박은(1370~1422)과 우의정 이원(1368~1429)을 영전사로 임명한다.

류관(1346~1433), 탁신(1367~1426), 변계량(1369~1430), 이수(1374~1430), 윤회(1380~1436), 어변갑(1381~1435), 신장(1382~1433), 김자(?~1428), 정인지(1396~1478), 최만리(?~1445), 최항(1409~1474), 하위지(1412~1456), 박팽년(1417~1456), 강희안(1417~1464), 신숙주(1417~1475), 이개(1417~1456), 성삼문(1418~1456), 김문(?~1448), 이선로(?~1453), 김종리(?~?), 유성원(?~1456) 등 수많은 사람이 조선 최고의 인재집단 집현전에서 근무하고 임금을 보좌하는 한편 인재등용과 양성, 서적 편찬 등을 하였다. 

 

 

 

 

 

집현전에서는 임금의 자문 담당, 강의를 듣고 토론하는 경전과 왕세자의 교육을 맡는 서연(書筵), 법제, 의례, 정치제도 등에서 미비한 점을 보완하였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조선 최고의 인재집단으로 만들어 역사, 지리, 의례, 농사, 문화,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조선 최고의 석학들로 구성된 인재집단 집현전은 훈민정음 반포의 산실이었며, 또한 적극적으로 반대한 곳도 집현전이었다.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며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집현전을 폐쇄했다.

단종복위사건에 집현전 출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연류되자 1456년 집현전을 폐쇄해 버렸다.

 

세종대왕의 치세에 큰 역할을 하였던 조선 최고의 인재집단 집현전이 1456년 폐쇄되었고, 300여 년이 흐른 1776년 정조대왕에 의해 규장각은 인재등용과 개혁정치의 산실로 부활한다.

 

 

 

 

 

 

 

 

 

 

 

 

정종실록 1권, 정종 1년 3월 13일(1399년)

처음으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집현전에 모이게 하였다.

대사헌 조박이 상언하였다.

"집현전은 한갓 그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으니, 청컨대 옛 제도를 회복하여 서적을 많이 비치하고 예문교서(藝文校書)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되, 문신 4품 이상으로서 관각(館閣)의 직책을 띤 자는 날을 번갈아 모여서 경적(經籍)을 강론하게 하여 고문(顧問)에 대비케 하소서."

 

임금이 심히 허락하고, 좌정승 조준·예천백·권중화, 대사헌 조박, 중추 권근·이첨으로 제조관을 삼고, 문신 5품 이하로 교리에 충당하고, 7품 이하로 설서 정자에 충당하였다.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1월 19일(1417년)

인재는 국가의 기용(器用)이므로 미리 양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르는바 수문전(修文殿) 집현전(集賢殿) 보문각(寶文閣) 등은 그 이름만 있을 뿐이요, 그 실상이 없으니, 바라건대, 나라 안에 집현전을 창립하고 관각의 제학 중에서 글을 주관할 만한 자 수원(數員)을 택하여 제조로 삼으소서.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3월 16일(1402년)

집현전에 새로 영전사 두 사람을 정1품으로, 대제학 두 사람을 정2품으로....

처음에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수문전, 집현전, 보문각의 대제학과 제학은 2품 이상으로 임명하고, 직제학 직전 직각은 3, 4품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러나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이 오직 문신으로 관직을 주었을 뿐이었는데, 이제에 이르러 모두 폐지하고, 다만 집현전만 남겨 두어 관사를 궁중에 두고,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이에 채워서,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였다.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1월 25일(1423년)

"정치하는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선무이다....."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6일(1456년)

(임금이) 명하기를

"집현전을 파하고, 경연을 정지하며, 거기에 소장하였던 서책은 모두 예문관에서 관장하게 하라." 하였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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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풍 2017.01.07 1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종대와 집현전,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출마자 싱크탱크 비슷한 것일까요?
    두뇌집단 폭이 넓을수록 사회가 발전하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

  2. 청결원 2017.01.07 19: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집현전의 관해 잘 보고 가네요

태종 이방원의 왕비이며 성군(聖君) 세종대왕의 어머니, 여장부 원경왕후 여흥 민씨

 

 

 

 

 

 

 

 

 

 

 

 

 

 

 

조선의 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의 왕비이며, 조선 4대 왕 성군 세종대왕의 어머니 원경왕후는 여흥 민씨다.

조선왕조에서 여흥 민씨 집안 규수가 조선의 국모(國母)인 중전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총 4명이다. 

 

 

 

조선의 19대 왕 숙종대왕의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도 여흥 민씨이며,

조선의 26대 왕이며 대한제국 초대황제 고종황제의 황후 명성황후도 여흥 민씨이고.

조선의 27대 왕이며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황제의 황후 순명황후도 여흥 민씨다.

 

 

 

 

 

태종 이방원은 2살 연상의 원경왕후 여흥 민씨와 혼례를 올렸다. 

두 사람의 혼례는 인생의 반려자를 만난 것이기도 했으며 또한, 정치적 동반자와의 만남이었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처 여흥 민씨를 정녕옹주(靖寧翁主)로 책봉한다.

 

조선의 3대 왕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여흥 민씨는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충녕대군 이도, 성녕대군 이종과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등 4남 4녀를 두었다.

 

 

 

 

 

 

 

 

 

 

 

 

 

 

원경왕후 여흥 민씨는 남편 이방원을 조선의 3대 왕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총명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도록 뒤에서 심혈을 기울인 내조자이며 정치적 동반자였다.

원경왕후의 동생 민무질, 민무구 형제도 매형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며 큰 공을 세웠다.

 

 

 

 

 

조선 창업 초기였던 조선은 아직도 고려왕조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었고 이곳저곳에서 고려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태종 이방원에게는 무엇보다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태종 이방원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안정을 위해 인정에 얽매이지 않고 비정한 정치적 결단을 내린다.

조선의 밝은 미래 태평성대를 열기 위해 조선을 기틀을 다지는 과정 태종 이방원은 타고난 영민함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공신과 외척(처족)을 처단한다.

 

모든 비난의 화살은 태종 이방원 자신이 다 받았으며 탄탄한 왕권과 국정안정의 기틀이 다져진 가운데 성군 세종대왕이 나왔다.

 

 

 

 

 

 

 

 

 

 

 

 

 

 

조선의 창업공신과 함께 태종의 처족, 즉 원경왕후의 동생 민무구, 민무질 형제도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다. 

조선왕조를 하루빨리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한 태종 이방원에게 처남들을 숙청했다.

 

 

 

 

태종 이방원은 창업 공신과 외척도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된다면 거침없이 처단했다.

권력은 부모 형제 처자와도 나눌 수 없다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아는 태종 이방원의 극약처방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선위(禪位)를 핑계로 권력에 빌붙으려고 하는 사람을 찾아냈다.

특히 외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왕세자(양녕대군)가 다음 보위에 오르면 민씨 일가 외척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왕세자였던 큰아들 이제(양녕대군)는 아버지 태종 이방원과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의 기대를 저버렸다.

결국, 양녕대군 때문에 권력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원경왕후의 동생이며 왕자와 공주들의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아버지 민제는 마음에 병을 얻어 죽었고, 민무휼과 민무희도 남편 이방원에 의해 죽었다.

 

 

 

 

 

 

 

 

 

 

 

 

 

 

 

 

아들 양녕대군이 원인이 되어 남편 태종 이방원의 명에 의해 원경왕후 여흥 민씨 가문은 멸문의 화를 입는다.

친정동생들이 관련된 일련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원경왕후 민씨는 폐위되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인생의 반려자와 정치적 동반자였던 남편을 조선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받쳤으나 결국 돌아온 것은 차가운 냉대와 친정이 멸문의 화를 입은 것이었다.

 

 

 

 

새 나라 조선이 건국되고 남편 이방원이 조선의 3대 왕으로 즉위하고 왕비가 된 원경왕후 여흥 민씨는 꿈이 이루어진 듯했다.

그러나 정치적 동반자였던 태종 이방원에 의해 친정이 멸족의 화를 당하고 자신마저 고립되는 상황에서 정치와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며 보냈다.

 

 

 

 

 

 

 

 

 

 

 

 

 

 

 

1418년 왕세자였던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조선의 4대 왕 세종으로 즉위한다.

1420년(세종 2년)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조선의 3대 왕 태종 이방원의 왕비이며, 조선의 4대 왕 성군 세종대왕의 어머니 원경왕후 여흥 민씨는 56세를 일기로 승하한다.

 

 

 

 

고려 명문가의 딸로 태어난 여흥 민씨는 대담하고 당찬 여장부였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남편을 왕으로 만든 킹메이커였다.

 

말년에 불교에 귀의한 원경왕후 여흥 민씨는 아버지와 4명의 동생, 그리고 요절한 막내아들 성녕대군의 명복을 빌며 조선의 국모로 살았던 21년간의 영욕의 세월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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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프다 2016.10.06 18: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근세조선의 4대 왕 세종(世宗)대왕 이도(훈민정음 한글 창제)

 

 

 

 

 

 

 

 

 

 

 

 

 

 

조선왕조 5백 년 27명의 임금 중에서 세종대왕은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조선의 3대 왕 태종대왕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충녕대군에서 왕세자가 되고 22세에 아버지 태종대왕 이방원이 선위(禪位)하여 조선의 4대 왕으로 등극했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이 조선왕조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루어낸 위대한 성군이라 후대에 대왕의 호칭을 붙였다고 하기도 하는데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조선 왕의 묘호가 모두 대왕이다.

 

 

 

조선의 3대 왕 태종대왕 이방원은 조선의 기틀을 세웠고 4대 왕 세종대왕은 조선을 발전시켰다.

온화한 성품과 일평생 지속한 학구열, 무엇보다 포용과 혁신의 지도력을 갖추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는 지혜로운 인재경영의 통솔력은 아직도 현대인에게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관련 서적도 많이 출판되어 있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의 치세(治世) 속에 신생국 조선은 정치, 외교, 군사, 천문, 경제 등 국가제도가 뿌리를 내리고 예악 문화가 융성해지는 등 모든 분야에서 500년을 이어나갈 조선왕조의 기틀이 다져졌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 이도는 공적으로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지만, 인간적으로는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도 뛰어난 업적 뒤에는 인간적인 고뇌가 숨어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 의해 백부와 숙부가 죽었고, 외숙부가 죽었으며, 장인도 죽었다.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세조)은 손자(단종)를 죽였으며, 셋째 아들(안평대군)도 죽였다.

 

자신의 형 양녕대군은 아들(세조)이 왕위 찬탈과 단종과 안평대군을 죽이는데 적극적으로 찬동하였다.

세종대왕과 문종대왕, 단종대왕을 모셨던 수많은 문무 대신이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죽어갔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 이도의 재위 기간 32년을 전후한 역사는 아버지(태종 이방원)와 아들(세조 이유)에 의해 친족, 외족, 처족과 충직한 신하들이 죽어간 피로 물든 가장 불행한 가족사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 이도는 1418년에 재위에 올라 1450년 승하할 때까지 32년간 재위에 있었다.

명에서 받은 시호는 장헌(莊憲)이며 ,존시를 합쳐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이

묘호(廟號) 세종(世宗)이고 시호(諡號)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 이도의 업적 중에 단연 으뜸으로 꼽는 것이 훈민정음(한글) 창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한글) 창제는 백성을 긍휼히 여긴 위민(爲民)정치이며 그 안에는 민본(民本)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훈민정음(한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홀대받고 있다.

이제는 홀대를 넘어서 한글(훈민정음) 파괴가 자행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글날이 되면 한글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한글의 위대성을 지구촌에 널리 알린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한글이 홀대받고 있다.

정부와 기업, 학교는 물론이거니와 TV, 신문, 광고, 일상생활 용어에 이르기까지 외래어가 난무하고 있다. 

 

 

 

 

 

 

 

 

 

 

 

 

세종대왕께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워낙 지극하여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한글) 창제를 위민(爲民), 애민(愛民), 민본(民本)정신의 발로(發露)라고 하지만, 정치적 목적도 다분히 있었다고 한다.

 

 

 

훈민정음(한글) 창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이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 이도의 훈민정음(한글) 창제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세종대왕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는 훈민정음(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나온다.

 

훈민정음(한글)은 창제(創製)가 아니고 모방(模倣)이다.

언문 28자는 세종대왕이 친히 지은 글이지만, 전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글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옛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글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란 말이 있듯이 옛글을 모방하였지만, 훈민정음(한글)에 발음표기, 음가 부여 등을 한 창조적인 글이다. 

 

 

 

 

훈민정음(한글) 공표(公表) - 1443년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경술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是謂訓民正音.

시월, 상천제언문이십팔자, 기자방고전... 시위훈민정음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훈민정음(한글) 반포(頒布) -1446년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

훈민정음(訓民正音) 어제(御製)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예조 판서 정인지 서문(序文)

"천지(天地)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情)을 통하여서, 삼재(三才)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용헌 이원 선생은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의 정신적 스승이다.

고려말에서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으로 고려왕조에서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개국 초기에 예조판서, 대사헌, 경상도 관찰사, 병조판서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조선의 창업자 태조대왕이 승하했을 때는 국장을 주관하는 빈전도감판사를 맡기도 하였다.

 

세종대왕 즉위년(1418) 이원을 우의정으로 제수하고 종묘에 보내서 아버지 태종대왕으로부터 전위 받았음고하게 한다.

이원은 세종 3년에 좌의정으로 승차한다.

 

 

 

용헌 이원 선생은 대사헌을 3번이나 할 정도로 조선 초기 공명정대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모든 일을 곧고 바르게 처리하는 과정에서 시기 질투하는 주변의 모함으로 귀양을 간다. 공신녹권을 박탈당하고 1429년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세조 2년에 신원이 복원된다.

 

 

 

 

 

 

 

 

 

 

 

 

 

 

 

이원은 고려말 문하시중을 지낸 행촌 이암 선생의 손자다.

행촌 이암은 『환단고기』 『단군세기』를 쓰신 분이다.

 

정종대왕과 함께 조선왕조 최고의 학구열을 가진 세종대왕에게 가장 옆에서 보필했던 이원은 『단군세기』를 당연히 올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옛 글자가 『단군세기』에 나온다. 바로 가림토 문자다. 

 

 

 

 

 

 

 

 

 

 

 

 

 

 

혹자는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림토 문자가 훈민정음(한글)을 모방한 위작이라고 한다.

훈민정음(한글) 공표와 반포는 3년의 시차를 두고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에 실려 있다.

조선 천지 백성에게 훈민정음을 알리는 공표를 할 때 분명히 옛글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하였다.

 

 

 

 

혹자는 훈민정음(한글)을 바탕으로 볼 때 가림토가 훈민정음 28자를 모방하여 근대에 만들어진 위작이라고 한다.

주객이 전도된 해석이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 모르고 있다.

 

그 사람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옛 글자, 즉 전자(篆字)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환단고기』가 위서라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연대 상으로 볼 때도 고려말에 쓰인 『환단고기』의 『단군세기』가 『조선왕조실록』보다 먼저다.

 

 

 

 

 

 

 

 

 

 

 

 

 

 

대한민국 강단사학자 중 단 한 명도 옛글을 찾기 위한 노력과 조사도 하지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

중화 사대주의와 일제 식민주의 사관을 답습한 주류 강단사학계의 불문율 중의 하나가 훈민정음(한글)의 모태가 되는 옛글을 절대 조사한다든가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주류 강단사학자는 『조선왕조실록』에와 있는 한민족의 상고사와 고대사 관련 서적에 대해서도 절대 말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주류 강단사학자에게 『환단고기』는 절대 검증해서는 안 되는 책이며, 동양의 우주론, 인성론, 수행관, 신(神)관  융합된 세계관이 없는 그들의 얄팍한 세속 지식으로는 검증할 수도 없는 책이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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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리더, 위대한 군주(君主)

세종대왕의 소통의 리더십

 

 

 

 

신하와 백성과 소통한 군주.

국정운영에 책임지는 군주.

최일선 현장에서 솔선수범하는 군주.

자기관리에 철저한 군주.

인재를 알아 보는 군주.

언제나 깨어있는 군주.

신하와 백성을 배려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군주.

훌륭한 리더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성군(聖君) 세종대왕.

 

 

권력 투쟁의 시퍼런 칼날이 휘몰아치는 모습을 보며, 조선의 4대 국왕으로 등극한 세종대왕.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벌어졌던 피로 얼룩진 세상사, 인간사의 허무함을 처절할 정도로 경험한 인간 이도(李).

 

그의 국정운영의 출발은 이런 허무(虛無)에서 출발한다.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권력이 무한할 것이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권력의 불꽃으로 뛰어드는 불나방과 같은 유한의 인간 존재에 대한 측은지심, 그 측은지심은 세종대왕이 군주로서 나설 때는 백성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승화된다.

 

유교(儒敎)가 조선이라는 국가의 통치 근본이었지만, 조선의 군주로서 그가 시작한 것은 노자의 도교 사상인 '대은(大隱)은 어시은(於市隱)'이라는 가르침이었다.

즉, 깊게 은둔하는 것은 시끌벅적한 시장 속에서 세상 사람과 동고동락하는 것이다. 만백성들과 함께 희노애락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교(佛敎) 철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권력은 사상누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나라가 안정되게 유지되려면, 백성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兵)과 백성들이 충분한 먹을거리(食), 그리고 만백성의 마음(民)과 믿음(信)을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셋 중에서 부득이하게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먼저 군사를 버릴 것이며, 그 다음은 먹을 것을 버려야 하고, 마지막까지 버리지 말고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백성들의 마음과 믿음임을 강조하였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의 마음의 화합이 국가 존립에 본질이며 우선이라고 보았다.

고려가 무너진 것도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서 버렸다고 보았다.

군주와 백성은 하나이며, 백성이 곧 국가이고, 민심은 곧 천심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왕의 위민(爲民)사상은 자신이 평생을 실천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와 무실역행(務實力行,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한다)은 또 다른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적인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며, 그가 말년에 지은 '월인천강지곡'에 세종대왕의 이상이 잘 나타나 있다.

 

 

 

 

세종대왕은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 닦음을 근본으로 하기 위해서 유교 불교 도교의 고전과 가르침으로 항상 수신(修身)하였다.

그리고 누구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였다.

백성들의 삶 속에 직접 들어가 현장중심의 철저한 국정운영을 바탕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만백성이 잘 살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유능한 인재를 발굴함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세종은 인재발굴에 귀천을 가리지 않았고, 그들의 능력에 부합하는 부서에 배치하여 그들의 능력을 한껏 배양하였다.

인간 세종의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능력있는 인재들을 발탁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한 인간경영을 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왕의 재위에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많은 인재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것은 인재들간의 경쟁심과 긴장감을 유발시켜 그들이 가진 잠재된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세종대왕의 또다른 인재경영법이었다.

정치의 대가 황희 정승과 맹사성, 군사에서는 김종서와 이종무, 천문과 역학 등에서는 장영실 이순지 이천 등, 문화의 꽃을 피운 집현전은 정인지 성상문 신숙주 박팽년 이개 등, 그리고 예악을 담당한 박연은 국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신하들과 소통하고, 백성들과 소통하며 모두가 소통할 수 있는 문자 훈민정음(한글)은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 중에 하나다.

 

 

 

 

권력 투쟁의 무상함과 무모함을 보았고, 왕권 강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그 희생된 사람들 속에는 세종의 백부와 숙부들, 외숙과 장인, 그리고 세종대왕 사후에는 자신의 둘째 아들의 칼아래 두 아들과 손자(단종)가 무참하게 희생됐다.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칭송 받고 있지만, 인간 이도(李)는 어찌보면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한 인간이었다.

한 나라의 군주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도 없는 큰 아픔을 가지고 있었지만, 군주로써 만백성을 위해 살다간 세종대왕,

그는 가장 훌륭한 리더였으며, 가장 위대한 군주였고, 성군(聖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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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0.08 05: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훌륭한 리더쉽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께
    정말 좋은 글이군요 ^^ 좋은 하루되세요~

  2. 명태랑 짜오기 2014.10.08 1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종대왕의 소통의 리더십이 성군으로 만들었는가 봅니다.
    정말 훌륭하고 위대한 군주였습니다^^

  3. 죽풍 2014.10.08 1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월인천강지곡을 꼭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소통은 어느시대나 중요한 화두인것 같네요.
    어느 사람이 새겨들어야 할 화두인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4. 반이. 2014.10.08 1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더쉽에 관한 좋은 글 잘 봤습니다 ㅎㅎ

  5. 청결원 2014.10.08 14: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더쉽의 관해 잘 보고 가네요

  6. 세상속에서 2014.10.08 15: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이름도 찬란한 세종대왕..
    잘보았습니다^^

  7. 넬리야뭐해 2014.10.14 04: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역사상 세종대왕시대가 민생들이 가장 살기 좋았다고 합니다. 리더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에게 잘 해주는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세종대왕의 한글과 (고)조선 가림토 문자

 

 

 

 

 

 

 

 

 

 

 

 

가장 과학적인 글 한글

가장 발달된 글 한글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글 한글

세계 문자 역사상 가장 진보된 글 한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 한글

가장 아름다운 글 한글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 한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문자학적 가치 한글

우리나라 한글에 대한 세계인들의 극찬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한글을 버렸다.

TV나 신문, 책과 인터넷, 길거리는 온통 외래어로 도배되어 있다.

신제품 출시에는 외래어 제품명이 필수가 되어 버렸고, 몇해 전에는 영어로 수업을 하자는 망발이 들리기도 했다.

 

 

지구촌이라는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외국어도 공부를 해야겠지만, 한글은 우리 선조들의 혼백이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며 우리가 지켜야할 삶의 가치다.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이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대한민국의 자랑 한글.

한(韓)민족의 가장 빛나는 위대한 문화유산 중에 하나 한글

 

자신들의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만백성들을 생각하는 애틋한 애민(愛憫)의 마음에서 비롯된 만백성의 어버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하신지 568주년이 되는 해다.

 

 

 

한글은 하늘과 땅, 인간이 조합된 언어다.

그리고 한글의 표현력은 세계 어느 문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정감있는 표현들이 너무 많다.

 

세상의 모든 문자는 한글로 번역할 수 있지만, 한글의 독창적 표현은 세계 어떤 언어나 문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한글이 완벽하고 최고의 글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한글은 세종대왕께서 독창적으로 창제(創製)하신 글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훈민정음(한글)에 옛 글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여...'

-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계해년 1433년) 12월 30일(경술일)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니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자가 있다. 그래서 옛 사람이 소리를 따라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뜻을 통하게 하고 삼재(三才)의 도를 심었으므로 후세에도 능히 바꾸지 아니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28년(병인년 1446년) 9월 29일(갑오일)

 

 

 

그리고 1750년 신경준이 지은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에도 '예로부터 사용하던 속용문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한글의 원형인 가림토 문자에 개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재위 2년 경자(단군기원 153년, BCE2181년), 이때 풍속이 일치하지 않고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달랐다.

비록 상형(象形), 표의(表意) 문자인 진서(眞書)가 있어도 열 가구 정도 모인 마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많고, 따이 백리가 되는 나라에서는 서로 문자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가륵단군께서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시어 '정음 38자'를 짓게 하시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고 전한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선조들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한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일 것이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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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0.07 05: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들에게
    정말 유용하겠어요^^ 잘보고 간답니다 ~

  2. 죽풍 2014.10.07 0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가 알게 모르게 쓰는 외래어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한글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3. FaithnLove 2014.10.07 09: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글의 소중함을 느끼고 갑니다.

  4. 세상속에서 2014.10.07 13: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종대왕 같은 분이 또 있을려나...

  5. 반이. 2014.10.07 14: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6. 소스킹 2014.10.07 15: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갑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7. 여행쟁이 김군 2014.10.07 1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ㅋ
    즐거운 하루 되시길

  8. 유라준 2014.10.07 2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글도 중요하지만, 예로부터 내려오던 글자에 대한 기록이 많이 없는 것이 아쉽네요.

  9. 주부s 2014.10.07 23: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가요^^

 

 

 

 

 

 

STB 상생방송 2월 4주차 편성표
2013년 2월 25일 ~ 3월 3일

 

 

 

 

 STB상생방송 2월4주차 편성표
구분 2월25일(월) 2월26일(화) 2월27일(수) 2월28일(목) 3월1일(금) 3월2일(토) 3월3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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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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