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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으로 시해된 조선의 국모

by 일신우일신 도생 2016. 10. 15.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여우사냥)으로 시해된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명성황후)

 

 

 

 

 

 

 

 

 

 

 

 

 

 

 

 

조선왕조에서 왕비, 즉 국모(國母)는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다.

만백성의 어버이가 왕과 왕비다. 왕은 나라를 다스렸고 왕비는 조선의 국모로서 내명부와 외명부를 통솔했다.

 

내명부는 궁궐 안의 후궁과 궁녀 등의 여인, 외명부는 궁궐 밖의 왕족(종친)과 공신과 문무신료의 어머니와 처 등 작위와 품계를 받은 사람의 부인 관리하였다.

  

 

 

 

왕비(대왕대비, 왕대비)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왕이 승하하고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일정 기간 또는 성인이 될 때까지 왕의 뒤에서 정치를 대리하던 수렴청정이 있었다. 이때를 제외하면 왕비는 권력투쟁에 나서면 안 된다.

 

조선왕조에서 왕이 제 역할을 못하고 허수아비 왕으로 재위했을 때나 조선왕조가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도 왕비와 외척 세력의 권력 전횡이 큰 원인이었다.

 

 

 

 

 

 

 

 

 

 

 

 

 

 

조선의 26대 왕 고종의 왕비, 즉 조선의 국모(國母) 중전은 여흥 민씨다.

 

1895년 10월 8일(양력)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일제 작전명 여우사냥)으로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가 시해됐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황제는 1895년 시해된 중전 민씨를 명성황후로 추봉한다.

 

 

 

 

최근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를 시해한 일본 낭인의 칼(히젠도)이 일본의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조선의 국모 시해사건(을미사변), 일본 작전명 여우사냥에서 중궁전에 난입하여 중전 민씨를 시해한 일당 중 한 명으로 지목된 도오 가쓰아키가 1908년 기증한 칼이라고 한다.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라는 글이 쓰여 있다고 한다.

칼을 구시다 신사에 기증할 당시 봉납 기록에는 '조선 왕비를 이 칼로 배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효명세자의 부인이며 조선의 25대 왕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흥선군과 뜻을 같이하여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조선의 26대 왕으로 만든다.

 

 

 

1863년(고종 즉위년) 고종이 12살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조대비가 잠시 수렴청정을 하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였다.

 

조선왕조에는 4명의 대원군이 있었다.

살아서 대원군에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 흥선대원군으로 고종을 섭정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중전 민씨는 죽을 때까지 권력 다툼을 하였고, 결국 아들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

 

 

 

 

 

흥선대원군은 부인 여흥 민씨(고종의 어머니)의 먼 친척이었던 민자영을 1866년 고종의 왕비로 선택한다.

민자영은 16살에 15살 고종의 왕비가 되어 조선의 국모 자리에 앉는다.

 

 

 

 

민자영(명성황후)은 숙종에게 폐위됐다가 복위된 인현왕후 민씨의 후손이다.

고종의 왕비 여흥 민씨(민자영, 1851~1895)는 민치록과 둘째 부인 한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민치록은 아들이 없어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여흥 민씨의 친동생 민승호를 양자로 들인다.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처남(고종 외삼촌)이면서 중전 민씨(명성황후)의 양오라버니(고종의 처남)다.

 

 

 

조선의 마지막 외척 세도정치 세력은 민씨 일파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이며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여흥 민씨와 중전 민씨(명성황후)는 먼 친척이며 외척 민씨 일파는 이 두 사람의 친척이다. 민씨 일파 세도정치 세력은 얽히고설켜 있다.

 

 

 

 

 

 

 

 

 

 

 

 

 

 

물밀듯 밀려오는 동서양 제국주의와 외척 정치로 조선은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난파 직전의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무리하게 정책을 시행했고, 막후에서 조정한 중전 민씨와 최익현의 탄핵을 받고 1763년 물러나면서 고종이 친정한다.

 

 

 

조선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도 쉽게 썩은 곳을 도려내지 못한 상태였다.

고종과 중전 민씨는 이런 조선을 개방했다. 조선이 누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당시 동서양 제국주의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내정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한 개국(開國, 문호를 엶)으로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는 한양 도성에 들어왔고 급기야 궁궐까지 난입하는 결과를 만든다.

 

 

 

 

1876년(고종 13) 일본은 조선 침략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불평등 강화도조약을 체결한다.

 

1881년 일본군의 도움으로 창설된 별기군은 우대하고 구식 군대 병사들은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급료로 주는 쌀에는 모래를 섞어 주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중전 민씨는 장호원으로 도망간다.

 

 

 

임오군란은 고종(명성황후)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은 민씨 일파의 부정부패가 만든 결과물이다.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복귀하자 중전 민씨는 청나라 군대를 들여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 톈진에 유배시킨다.

 

 

 

 

 

 

 

 

 

 

 

 

 

 

1884년 급진개화파가 수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중전 민씨는 청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한다.

조선 조정은 민씨 일파가 장악하게 되고 여흥 민씨 세도정치로 민생은 파탄난다. 

1885년 청나라와 일본은 각 나라가 조선에 파병할 때는 서로 알린다는 내용의 천진 조약을 맺는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고종(중전 민씨)과 민씨 일파는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다.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천진조약에 의해 일본군 출병을 부른 결과를 만든다.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제1차 청일전쟁이 벌어진다.

 

 

청일전쟁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고 그 와중에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동군농민군 30만 명이 무참하게 학살된다.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면서 조선은 망국의 길로 빠르게 달려간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4월 17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와 대만 등지를 차지한다.

나라가 패배하자 중전 민씨는 러시아를 끌어들인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 연합, 이른바 3국 간섭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한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손을 뻗은 중전 민씨는 일본에게 눈엣가시였다.

일본 제국주의 수뇌부는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를 제거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준비한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 군인과 낭인들이 궁궐에 난입하여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다.

 

 

 

중전 민씨를 시해한 일본은 강화도조약의 속인주의에 따라 범인들을 일본으로 소환하여 자국의 법으로 처리한다. 

한 나라의 국모를 참살 만행을 저지른 범인들을 일본 법원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무죄방면 하였다.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가 참되고 폐위됐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에 의병운동이 일어난다.

 

일제에 의해 유폐되다시피한 고종은 세자와 함께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간 지낸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고종의 왕비이며 조선의 국모인 중전 민씨는 시해된 지 2년이 지난 1897년 시신없는 장례를 치르고,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 시호를 받았다.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의 시해사건(을미사변)에 조선인 배후세력이 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물증은 없다.

그리고 일본이 시해하고 불태웠다는 중전 민씨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을미사변으로 시해됐다고 전해지는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당시 암살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피신하여 다른 곳에서 숨어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는 명성황후 생존설도 있다.

 

 

 

 

 

 

 

 

 

 

 

 

 

 

조선왕조에서 왕비는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다.

중전 민씨가 고종이었다면 모르지만, 중전 민씨는 왕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민하고 정치 감각이 뛰어났다고 평가되는 중전 민씨는 오직 자신과 민씨 일파의 권력 강화에만 힘을 쏟는데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외세를 끌어들인 왕비의 권력 행사도 문제고, 권력을 전횡하며 부정부패를 일삼은 여흥 민씨 세도정치도 문제다.

매관매직과 부정부패로 백성들은 수탈당하고 민생은 파탄 났는데 민씨 일파와 중전 민씨(명성황후)는 왕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했다.

 

 

악녀였든 여걸이었든 명성황후로 추존된 중전 민씨는 조선의 국모였다.

중전 민씨(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전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쳤다는 것은 드라마 대사일 뿐 전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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