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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치세를 뒤집은 정순왕후 김씨

by 도생(道生) 2016. 10. 13.

소통군주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치세(治世)를 뒤집은 영조의 계비,

사도세자의 계모, 정조대왕의 계조모 정순왕후 경주 김씨

 

 

 

 

 

 

 

 

 

 

 

 

 

 

 

조선왕조의 대표적 소통군주이며 근대화와 문화융성을 이룬 개혁군주의 상징 정조대왕은 치세(治世)로 부강을 꿈꾸던 군주였다.정조대왕의 치세를 뒤집어 조선이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중심에 영조(1694~1776)의 계비, 사도세자(1735~1762)의 계모, 정조(1752~1800)의 계조모인 정순왕후 경주 김씨(1745~1805)가 있었다.

 

 

 

 

정순왕후 경주 김씨는 1745년(영조 21) 노론계 경주 김씨 김한구와 원주 원씨 사이에서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조선의 21대 왕 영조대왕 이금의 왕비(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1757년(영조 33)에 66세로 승하한다.

 

 

 

장희빈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영조의 아버지 숙종이 후궁은 절대 왕비가 될 수 없게 하였다.

조선의 국모자리가 비어 있자 신하들이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라는 강권에 마지못해 새로운 왕비를 맞는다.

 

 

 

 

장순왕후 경주 김씨는 1759년(영조 35)에 영조의 두 번째(계비) 부인이 되어 조선의 국모가 된다.  

당시 영조는 66살의 노인이었고, 정순왕후 경주 김씨는 15세였다.

영조와 정순왕후는 무려 51세의 나이 차이가 났다.

 

 

 

 

 

 

 

 

 

 

 

 

 

 

정순왕후가 왕비가 된 시점은 정조대왕의 아버지 25세의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고 있을 때였다.

사도세자는 15세였던 1749년부터 1762년까지 근 14년간 대리청정을 하였다.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오른 영조, 노론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김씨, 사도세자의 세자빈 혜경궁 홍씨 집안도 노론이었다.

 

노론(벽파) 세력이 정국을 주도할 때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노론과 첨예한 갈등을 빚는다.

노론 내부의 치열한 권력다툼과 노론과 사도세자의 갈등은 결국 아버지 영조가 아들 세도세자를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을 만든다.

 

 

 

 

 

영조의 계비, 사도세자의 계모, 정조의 계조모인 정순왕후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외척, 영조의 딸 화안옹주와 양아들 정후겸 등 노론(벽파) 세력이 뭉쳤다.

 

사도세자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세력은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의 아들인 왕세손 이산(정조대왕)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온갖 협작질을 했으나 영조는 끝까지 왕세손 이산만은 지켜 조선의 22대 왕으로 등극하게 한다.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대왕은 어머니 홍씨의 친정아버지이자 자신의 외할아버지 홍봉한과 계조모 정순왕후를 제외한 노론 벽파 세력을 숙청했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과 연관된 강경파 노론 벽파가 상당수 숙청됐고 온건파였던 노론 시파는 살아남았다. 

정조대왕이 정치적 목적으로 남겨둔 노론 벽파 세력은 뿌리를 깊이 내렸던 만큼 서서히 세력을 회복해 나간다. 

 

 

 

 

주도권을 잃은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 세력은 사도세자의 서자이며 정조대왕의 이복동생 은언군을 죽일 것을 주장하였다.

정순왕후는 은언군의 큰아들 상계군을 역모로 몰아 은언군을 죽이라는 언문전교를 내린다.

 

 

 

그러나 정조대왕은 이복동생 은언군의 목숨을 끝까지 지켰다.

강화도로 유배됐던 은언군의 손자가 바로 조선의 25대 왕으로 즉위한 강화도령 철종이다.

 

정조대왕 승하 후 정순왕후 경주 김씨가 수렴청정하던 때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는 천주학을 한다는 이유로 처형됐고 은언군도 사사된다.

 

 

 

 

 

 

 

 

 

 

 

 

 

 

1800년(정조 24) 병세가 깊어진 개혁군주 정조대왕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한다.

 

정조의 승하를 본 사람은 영조의 계비, 사도세자의 계모, 정조의 계조모인 정순왕후 경주 김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정조대왕의 최대 정적이었던 정순왕후 경주 김씨가 혼자서 약을 가지고 들어간 뒤 정조가 승하하여 독살설이 끊임없이 회자한다.

 

 

 

 

정조대왕은 승하하기 전 왕세자 아들(순조)을 장인인 노론 시파 안동 김씨 김조순에게 잘 보필하여 주라고 부탁하였다.

 

박학다식하고 혁군주의 상징이었던 정조대왕 이산의 일생일대 가장 큰 실수였다.

당시 치열한 대립과 권력투쟁의 상황 속에서 정조가 선택할 수 있는 한계도 있었겠지만, 정조가 선택한 김조순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정조대왕이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조선을 개혁한 개혁군주 정조의 치세는 정순왕후와 그 일파에 의해 뒤집어지며 정조의 개혁정치는 물거품이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년) 11살 순조의 즉위와 함께 수렴청정을 시작한 대왕대비 정순왕후 경주 김씨와 부활한 노론 벽파는 정조와 함께 개혁정치의 최일선에서 조선을 근대화시키고 문화를 융성하게 한 신하들을 숙청하는 등 정조의 치세를 모두 뒤집어버린다. 

이들은 남인을 제거하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신유박해를 만든다. 

 

 

 

 

 

1803년(순조 3) 정순왕후는 창경궁 인정전의 화재 발생 이후 대리청정을 그만두고 물러난다.

1805(순조 5) 정순왕후 경주 김씨가 61살에 세상을 떠난다.

 

15살 어린 나이에 66살의 할아버지뻘인 영조의 두 번째 왕비가 되어 가례를 올렸다.

영조와 16년, 영조가 승하하고 30년 동안 궁궐에서 지내며 권력의 쫓는 불나방의 삶을 살았다.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순조의 부인이며 효명세자 세자의 어머니인 순원왕후 안동 김씨 외척 세력이 권력을 전횡한다.

 

순조의 장인이며 노론 시파인 김조순은 순조를 섭정하며 노론 벽파를 숙청하고 부정부패와 권력 남용을 일삼는다.

김조순을 시작으로 한 60년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조선을 몰락의 길로 몰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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