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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절대군주 숙종과 왕비 인현왕후와 장희빈(장옥정)

by 도생(道生) 2016. 10. 14.

 

추락한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의 절대군주 상징이 된 숙종

폐위됐다가 복위된 숙종의 왕비(계비) 인현왕후와 궁녀에서 왕비가 된 장희빈(장옥정)

 

 

 

 

 

 

 

 

 

 

 

 

 

 

 

 

중국의 강희제가 청나라 4대 황제로 61년간 재위할 때 조선은 19대 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이 약 46년간 재위하였다.

 

청나라를 61년간 다스리며 중국 역사상 가장 재위 기간이 긴 황제이며 위대한 황제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강희제(1654~1722, 재위 1661~1722)는 제후국(신하의 나라) 조선을 보고 군약신강(君弱臣强)이라고 말하였다.

 

 

 

 

존명사대(尊明事大) 명분으로 숭명배청(崇明排淸) 정책의 소중화(小中華)의식은 결국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가져왔다.

 

숙종은 증조할아버지 인조의 삼전도 굴욕(청나라 2대 황제 숭덕제)을 잊을 수 없었고, 할아버지 효종의 북벌정책, 아버지 현종 때는 분당의 정치적 대립 양상을 띤 예송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왕위에 올랐다.

 

13살에 조선의 19대 왕으로 즉위한 숙종의 옆에는 8살에 청나라 4대 황제에 올라 청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강희제가 있었다.

 

 

 

 

 

 

 

 

 

 

 

 

 

 

혹자는 숙종을 조변석개(朝變夕改)의 태도를 보인 군주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아침에 결정한 것을 저녁에 다시 고치는 일관성 없는 군주란 의미다.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왕권을 구사한 조선의 절대군주 상징이라 말하기도 한다.

 

 

 

서인(노론과 소론으로 분열)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 예송논쟁 속에 13살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라 수렴청정을 거치지 않고 친정을 하는 과정에서 추락한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숙종은 서인과 남인의 정치 주도권을 바꾸는 환국정치를 세 번 했다.

경신환국(1680년 숙종 6, 서인 집권), 기사환국(1689년 숙종 15, 남인 집권), 갑술환국(1694년 숙종 20, 서인 집권)이다.

 

 

 

 

숙종은 정치적 국면 전환의 방편으로 환국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

 

정치적 대립이 치열했던 당쟁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강력한 왕권을 다져나갔지만, 숙종의 말 한마디에 뒤바뀌는 환국정치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환국정치로 왕권을 강화한 숙종의 말 한마디로 정권이 교체되고 수많은 인명이 죽어갔기 때문에 절대군주의 상징이 됐다.

 

 

 

 

 

 

 

 

 

 

 

 

 

 

 

숙종의 왕비(계비) 인현왕후의 폐위와 복위, 왕비로 올랐다가 희빈으로 강등된 장희빈(장옥정)은 환국정치와 관련이 있다.

 

서인의 지지를 받던 인현왕후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주도권을 잡는 과정에서 폐비가 되었다.

남인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장옥정)은 서인이 제기한 원자(경종) 문제를 빌미로 서인을 축출되고 조선의 국모, 중전의 자리에 오른다. 

 

 

 

장희빈(장옥정)은 숙종이 붕당과 관계없이 총애하였다. 숙종과 장희빈이 언제 만났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인물이 예뻤다고 전하는 장희빈(장옥정)의 조상 3대를 숙종은 정승으로 추증하기도 했다.

 

 

 

 

숙종의 부인은 후궁을 제외하고 왕비가 네 명이다.

정비 인경왕후 광산 김씨(1661~1680, 재위 1670~1674), 1계비 인현왕후 여흥 민씨(1667~1701, 재위 1681~1689, 복위 1694~1701), 2계비 인원왕후 경주 김씨(1687~1757, 재위 1702~1720)다.

 

 

조선의 20대 왕 경종의 어머니로 폐위된 중전 장씨(장희빈, 장옥정)를 정식 왕비로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3명의 왕비다. 조선의 21대 왕 영조의 어머니도 숙종의 왕비가 아닌 후궁 숙빈 최씨다.

 

 

 

 

 

 

 

 

 

 

 

 

 

 

 

조선의 19대 왕 숙종이 왕세자 시절 가례를 올린 세자빈 광산 김씨(1661~1680)가 숙종의 정비(正妃, 왕비) 인경왕후(재위 1674~1680)다. 공주 둘을 낳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는 천연두(시두)에 걸려 1680년(숙종 6) 승하한다.

1681년(숙종 7) 여흥 민씨가 숙종의 왕비(계비)로 들어온다. 바로 인현왕후다.

 

 

 

1680년(숙종 6)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던 장옥정(장희빈)을 출궁시킨다..

1686년(숙종 12) 출궁 당했던 궁녀 장옥정이 재입궁하고 숙종은 후궁 숙원으로 책봉한다. 

 

 

 

1688년(숙종 14) 궁녀 출신 숙종의 후궁 장옥정을 소의가 되어 숙종의 아들(조선 20대 왕 경종)을 낳는다.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원자)로 만들기 위하여 이름(정호定號)을 짓는 문제가 당쟁으로 비화하여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이 집권하는 기사환국(1689년)을 단행한다. 당시 서인은 인현왕후가 23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적통(적자)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현왕후의 폐위와 장희빈(장옥정)의 왕비 책봉은 기사환국(1689년)과 인현왕후의 복위와 중전(왕비) 장씨(장희빈)의 강등은 갑술환국(1694년)과 연관되어 있다.

 

 

 

 

1689년(숙종 15)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여흥 민씨가 폐위되고 소의 장씨(장옥정)가 희빈을 거쳐 왕비로 책봉된다.

 

"내가 양조(兩朝)의 폐비(廢妃)할 때의 고사(故事)를 보건대, 윤씨(尹氏)가 잘못한 바는 단지 투기(妬忌)에 있었는데, 죄상이 이미 드러나자 성묘(成廟)께서 종사(宗社)를 위해 깊이 근심하고 먼 앞날을 생각하시어 단연코 폐출(廢黜)하셨다.

 

더욱이 오늘날 민씨는 허물을 지고 범한 것이 윤씨보다 더하고, 윤씨에게 없었던 행동까지 겸하였으며, 선왕(先王)·선비(先妃)의 하교를 지어 내어 종사에 죄를 얻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아 사제(私第)로 돌려보내니, 종묘에 고하고 교서(敎書)를 반포하며 그 부모의 봉작(封爵)을 빼앗는 등의 일은 한결같이 구례(舊例)에 의하여 즉시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숙종실록』 21권 1689년 5월 2일(숙종 15)

 

 

 

 

 

 

1690년(숙종 16)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 비록 궁녀 출신이지만 장희빈을 조선의 국모, 왕비로 책봉한다.

같은 해 숙종과 장희빈의 둘째 아들이며 경종의 동생인 성수를 낳았으나 두 달 남짓 만에 죽는다.

 

 

 

 

장희빈(장옥정)은 숙종 15년(1689)부터 숙종 20년(1694)까지 조선의 19대 왕 숙종의 왕비가 되어 조선의 국모 자리에 있었다.

 

"주역(周易)은 건곤(乾坤)을 기본으로 하였고, 시경(詩經)은 관저(關雎)를 첫머리로 하였으니, 대저 풍속을 바르게 하고 비필(妃匹)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 주곤(主壼)을 아직 세우지 못하여 음교(陰敎)가 통달하지 아니하니, 위호(位號)를 정하는 것을 하루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희빈(禧嬪) 장씨(張氏)는 좋은 집에 태어나서 머리를 따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서 인효 공검(人孝恭儉)하여 덕이 후궁(後宮)에 드러나 일국의 모의(母儀)가 될 만하니, 함께 종묘(宗廟)를 받들고 영구히 하늘의 상서로움을 받을 것이다. 이에 올려서 왕비를 삼노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일체 예절(禮節)에 따라 즉각 거행하게 하라."

숙종실록 21권 1689년 5월 6일(숙종 15)

 

 

 

 

 

 

 

 

 

 

 

 

 

 

 

숙종은 1694년(숙종 20년 4월 1일) 갑술환국 직후에 왕비 장씨(장옥정)를 희빈으로 강등시킨다.

 

"국운(國運)이 안태(安泰)를 회복하여 중곤(中壼)이 복위하였으니,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장씨(張氏)의 왕후 새수(王后璽綬)를 거두고, 이어서 희빈(禧嬪)의 옛 작호를 내려 주고 세자(世子)가 조석으로 문안하는 예(禮)는 폐(廢)하지 않도록 하라."

숙종실록 26권 1694년 4월 12일(숙종 20)

 

 

 

 

 

숙종은 중전 장씨(장옥정)를 장희빈으로 강등한 후 인현왕후를 왕비로 복위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생각해 보건대, 부족한 몸이 큰 왕업(王業)을 지키면서 중곤(中壼) 에게 재앙이 얽히어 일찍이 적의(翟儀) 가 비게 되는 슬픔을 당했다가,

명문(名門)을 점쳐 내어 크게 길한 봉황이 날아드는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다. 왕비 민씨는 아름다운 덕음(德音)을 잘 이어받아 착한 범절이 크게 빛났다. 치장한 비녀와 귀고리를 치우며 자주 잠계(箴戒)를 진언하고 갈담시(葛覃詩) 처럼 부지런히 일을 보매 점점 풍교(風敎)가 나타나게 되었으며, 조심해서 양전(兩殿)을 받들되 언제나 화평하고 순탄한 안색을 가지었고, 나와 함께 삼년상(三年喪)을 치르면서는 대신해서 서러워하는 예절을 다하였다."

숙종실록 27권 1694년 6월 1일(숙종 20)

 

 

 

 

 

1701년(숙종 27) 왕비로 복위된 인현왕후 여흥 민씨가 35살에 승하한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승하한 직후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만들어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로 장희빈(장옥정)은 죽게 된다.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내전(內殿)을 질투하고 원망하여 몰래 모해하려고 도모하여, 신당(神堂)을 궁궐의 안팎에 설치하고 밤낮으로 기축(祈祝)하며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을 두 대궐에다 묻은 것이 낭자할 뿐만 아니라 그 정상이 죄다 드러났으니,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하는 바이다...

 

장씨는 전의 비망기(備忘記)에 의하여 하여금 자진(自盡)하게 하라.

아! 세자의 사정을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아니하였겠는가? 만약 최석정(崔錫鼎)의 차자의 글과 같이 도리에 어긋나고 끌어다가 비유한 것에 윤기(倫紀)가 없는 경우는 진실로 족히 논할 것이 없겠지만, 대신과 여러 신하들의 춘궁을 위하여 애쓰는 정성을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또 다시 충분히 생각한 결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처분을 버려두고는 실로 다른 도리가 없다. 이에 나의 뜻을 가지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유시하는 바이다."

숙종실록 35권 1701년 10월 8일(숙종 27)

 

 

 

 

 

 

 

 

 

 

 

 

 

 

장희빈이 조선의 왕비 자리에서 희빈으로 강등되던 1694년(숙종 20) 천민 출신의 궁녀로 숙종의 후궁이 된 숙빈 최씨가 조선의 21대 왕으로 등극하는 영조를 낳는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시킬 때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고 했다가 예와 덕을 갖춘 사람이라며 인현왕후 여흥 민씨를 복위시켰다.

 

숙종은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할 때 효와 덕이 커 조선의 국모가 될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가 인간과 신(神)이 분노할 정도로 죄가 커 죽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인현왕후와 20년 인연, 장희빈과는 20년이 넘는 인연을 가지고 지켜본 숙종이 스스로 자신이 한 말, 즉 왕명을 뒤집었다.

 

 

 

 

 

 

 

 

 

 

 

 

 

 

 

 

 

 

환국정치와 인현왕후 폐위와 복위, 장희빈에 놀라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제도를 만드는 등 숙종의 이런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조변석개(祖變夕改)의 군주라고 말한다.

 

 

 

숙종은 추락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붕당 간 정치적 대립을 이용하여 집권 정당(붕당)을 교체하는 환국정치로 최고권력자인 왕에게 충성을 유도하였다. 13살 어린 나이에 수렴청정을 거치지 않고 46년간 친정했던 만큼 숙종은 총명했다고 학자들은 평가한다. 여자문제만 빼고...

 

 

숙종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왕권을 강화하고 국방, 경제, 사회, 문화 등 조선을 안정시키 많은 치적을 남겼다.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의 대립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한 숙종은 절대군주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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