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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천주교 4대 탄압 박해- 신유 기해 병오 병인박해

by 도생(道生) 2016. 12. 24.

조선 후기 천주교 4대 탄압(彈壓)과 박해(迫害) - 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조선 조정의 천주교(가톨릭) 4대 탄압과 박해 사건은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다.

탄압(彈壓)은 권력과 무력으로 개인 또는 집단을 억지로 눌러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박해(迫害)는 핍박하여 해롭게 함, 못살게 굴어서 해롭게 한다는 것이 탄압과 박해의 사전적 의미다.

 

 

 

종교라는 말은 도교,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의 총칭이다.

종교(宗敎)는 19세기 말 일본에 의해 정의된 개념으로 우리가 종교라는 말을 사용한 지는 불과 1백여 년 남짓밖에 안 된다.

가톨릭이 조선에 유입된기에는 서학(西學), 사학(邪學), 천주학 등으로 불렸다.

 

 

 

 

 

천주교 탄압과 박해는 차별과 탄압, 박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천주교 측과 학자들이 정의한 개념이다.

천주교 탄압과 박해가 이루어졌던 당시는 왕조시대(봉건시대)였기 때문에 천주교 탄압과 박해에 앞장섰던 당시 조선의 왕과 조정 대신 누구도 탄압과 박해라고 하지 않았다.

 

인권침해, 종교의 자유 등이 심각하게 침해됐다는 주장은 민주주의 이념이 들어선 근현대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창업한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한 나라다.

조선이 천주교가 들어온 초기부터 일방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못살게 괴롭히는 탄압과 박해를 가한 것은 아니다.

 

 

 

가톨릭(천주교)이 조선에 들어온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며, 여러 설이 전한다.

여러 설 중에서도 서양 문물과 함께 가톨릭 서적을 들여것으로 추정되는 두 인물이 있다.

 

 

1631년(인조 9) 정두원이 명나라로부터 가톨릭 서적을 들여왔고, 병자호란(1636~1637)이 끝나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가톨릭 선교사 아담 샬 신부와 접촉하여 1645년(인조 23) 귀국하면서 가톨릭 서적을 조선에 들여왔다는 것이다.

 

 

 

 

가톨릭 선교사 마테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는 1603년(선조 36) 출판되었다.

마테오 리치 신부가 출간한 천주실의天主實義』는 가톨릭이 조선에 조선 팔도에 전파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서학(西學, 사학邪學 천주학)이 처음 등장한 때는 정조 15년(1791)이다.

정두원과 소현세자가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귀국한 1631년(인조 9)과 1645년(인조 23)으로부터 계산해도 150년에서 160년 후다.

 

처음 극소수의 신자로 시작하여 암암리에 세력을 넓히며 활동한 조선의 가톨릭 신도들은 이후 숫자가 어느 정도까지 늘어났는지 통계는 없다. 약 150년 동안 조선이 가톨릭을 크게 차별하거나 탄압, 박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 이념의 조선은 사회체제가 붕괴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자 천주교를 박해했고, 때론 특정 당파가 천주교(천주학, 서학)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탄압과 박해를 받기도 했다. 당시 절대 소수로 희생당한 천주학(천주교, 서학) 신도의 처지에서는 일방적으로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천주교 탄압과 박해는 크게 1791년(정조 15)의 신해박해,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와 1839년(헌종 5)의 기해박해, 1846년(헌종 15) 병오박해,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등이 있다.

 

정조 재위 시 일어났던 신해박해를 제외하고,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를 천주교 4대 탄압과 박해 사건이라 한다.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0월 16일(1791년)

사헌부가 아뢰기를

"천주학은 바로 이치에 어긋난 이단으로서 세상을 현혹하고 백성을 속이는 것 가운데 가장 심한 것입니다...."

 

 

 

정조 15년 10월 23일(1791년)

지평 한영규가 아뢰기를

"서양의 간특한 설이 언제부터 나왔으며 누구를 통해 전해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세상을 현혹하고 백성을 속이며 윤리와 강상을 어지럽히는 것이 어찌 진산의 권상연, 윤지충 양적과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제사를 폐지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위패를 불태우고 조문을 거절하는 것으로도 그치지 않고 그 부모의 시신을 내버렸으니, 그 죄악을 따져본다면 어찌 하루라도 이 하늘과 땅 사이에 그대로 용납해 둘 수 있겠습니까...."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은 1791년(정조 15, 신해년)에 일어났다.

신해박해 또는 진산사건이라고도 한다.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로 불리는 윤지충(1559~1791)과 권상연(1751~1791)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위패를 불태웠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사회 문제화 되었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참수됐다.

 

 

 

두 번째 천주교 박해는 1801년(순조 1, 신유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다.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대리청정을 한 정순왕후는 표면적으로는 당시 조선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던 천주학(천주교)을 차단하기 위해 박해하였다. 그러나 신유박해의 이면에는 노론 벽파 세력과 정치적 대립관계였던 남인을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고 박해 한다. 당시 남인 출신 중에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장약용의 형이며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를 저술한 정약종과 조선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을 비롯하여 300여 명이 희생됐다. 황사영의 백서가 발각되면서 역모사건으로 규정된다.

 

 

 

세 번째 천주교 박해는 1839년(헌종 5, 기해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다.

천주교 기해박해의 또 다른 모습은 세도정치의 권력투쟁이다.

조인영을 중심으로 노론 벽파 세력 풍양 조씨가 노론 시파세력 안동 김씨를 몰아낸 사건이다.

순원왕후가 척사윤음(斥邪倫音)을 내리면서 천주교 탄압과 박해가 시작되었다.

 

 

 

네 번째 천주교 탄압과 박해는 1846년(헌종 12)에 일어난 병오박해다.

조선인 최초의 가톨릭 신부 김대건이 참수당한 사건이다.

 

 

 

다섯 번째 천주교 탄압과 박해는 1866년(고종 3)에 일어난 병인박해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고 가장 크게 화를 당한 사건이 병인박해다.

서울 합정동에 있는 잠두봉(용두봉)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목이 잘려 처형한 곳이라 하여 천주교에서는 절두산(切頭山)성지라 이름 붙였다.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최대 8천 명에서 약 1만 명에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됐다고 한다.

병인박해는 병인양요로 이어져 프랑스군대가 패하여 도망가면서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를 훔쳐간다.

 

 

 

 

조선왕조는 성리학 체제를 기반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전통적 가치가 무너지고 사회질서가 혼란해지자 조선은 가톨릭을 사학(邪學)으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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