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삼정의 문란과 지역차별 - 홍경래의 난

by 도생(道生) 2016. 12. 26.

세도정치에 의한 삼정의 문란과 지역 차별로 발생한 민란(民亂) 홍경래의 난

 

 

 

 

 

 

 

 

 

 

 

 

 

 

1811년(순조 11)에 조선 서북지역에서 발생한 홍경래는 크게 두 가지 명분을 내세우며 난을 일으켰다.

하나는 세도정치에 의한 삼정의 문란과 함께 흉년이 겹치면서 백성의 삶이 피폐해진 것이며,

둘째는 조선왕조 초기부터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기까지 함경도와 평안도 등 서북지역 출신을 차별하는 지역 차별 때문이다.

 

 

 

조선의 위대한 군주이며 강력한 왕권으로 개혁정치를 한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왕권은 급속하게 약화했다.

조선 23대 왕 순조(1790~1834, 재위 1800~1834)가 즉위하고 경주 김씨와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정순왕후의 외척 세력 경주 김씨와 순원왕후의 안동 김씨 일파는 11살에 왕위에 오른 순조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還穀, 환곡) 등 권력을 독점한 세력의 세도정치가 국정을 농단한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조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매관매직, 부정부패, 탐관오리와 아전들의 백성 착취는 극에 달하였으며, 1809년(순조 9)부터 이어진 흉년은 백성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지역차별은 홍경래가 난을 일으킬 당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 초기부터 시작됐다.

조선의 서북지역은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가 활약한 곳이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 창업에 공을 세운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을 경계하였다. 

 

서북지역 출신이 용맹하지만, 기질이 사나워 반역할 수 있기 때문에 서북지역 출신 사람을 중용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근 400년간 서북지역에 대한 지역 차별의 감정을 홍경래가 폭발시켰다.

 

 

 

 

홍경래는 조선왕조가 개국한 이래 서북지역 출신으로 높은 벼슬을 한 이가 없었다고 말하여 반란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지역차별을 강조했다.

 

세도정치에 의한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은 완전히 무너졌다.지역 차별로 인한 서북 지역인들의 감정과 「정감록」의 진인(眞人) 출현설 등이 빠르게 유포되면서 홍경래의 난은 백성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강한 열망을 던져주었다.

 

 

홍경래, 우군칙, 이희저, 김사용, 김창시, 홍총각, 이제초 등이 다복동에 본거지를 두고 봉기한다.

홍경래의 난은 지역적으로는 평안도 서북지역 출신이 많았으며,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등지에서도 모여들었다.

반란 참여 계층은 향반, 상인, 농민, 유랑민, 노비 등으로 구성되었다.

 

 

 

 

 

 

 

 

 

 

 

 

 

 

1811년(순조 11) 12월 18일 다복동에 1,000여 명의 무장병력이 집결한 가운데 김창시가 격문을 읽으면서 홍경래의 난이 시작되었다.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고 빠른 속도로 청천강 이북의 9개 읍을 점령했으나, 12월 29일 반란군과 관군이 처음 맞붙은 송림전투에서 대패했다. 대규모 관군과 전투에서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관군이 일반 백성까지 반란군으로 간주하여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하자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일절 피해를 주지 않았던 홍경래의 반란군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정주성에서 관군과 반란군이 공방전을 벌인다. 

 

  

1812년(순조 12) 4월 19일 관군이 폭약으로 정주성을 무너뜨리고 성안으로 들어가 반란군을 진압한다.

홍경래는 관군이 정주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총을 맞고 죽었고, 정주성 안에 있던 반란군 중 어린이와 여성을 제외한 약 2천 명이 참살당한다. 탄환을 맞고 죽은 홍경래도 참수당했다.

 

 

 

홍경래의 난은 순조 즉위 초기 세도정치가 시작될 때부터 준비했다.

홍경래의 난은 반란 초기 내분과 전략적 실수, 대규모 관군보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4개월 만에 실패로 끝나버린 홍경래의 난은 외척세력의 세도정치가 낳은 폐해다.

조선왕조가 망국의 길을 걷는 근 100년간 지속한 외척 세력의 세도정치는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진주민란과 동학 농민혁명으로 이어진다.

 

 

 

『순조실록』 15권, 순조 12년 4월 21일(1812년)

관군이 정주를 수복하였다.

평안 감사가 '이 달 19일에 관군이 정주성을 수복하고 적괴(賊魁) 홍경래 등을 참획(斬獲)하였다고.'라고 치계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