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흥선대원군 이하응 쇄국정책과 척화비 건립

by 도생(道生) 2016. 12. 28.

조선 26대 왕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쇄국정책(鎖國政策)과 척화비(斥和碑) 건립

 

 

 

 

 

 

 

 

 

 

 

 

 

인간은 누구나 공(功)과 과(過)가 있다.

한 나라의 국정(國政)을 운영한 사람이라면 그 책임은 더욱 막중하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한때 조선의 국정을 책임진 한 사람이었으며,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한 이래 근 5백 년 동안 조선은 여러 번의 내란과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외침도 있었다. 1863년 조선 26대 왕 고종이 즉위할 때는 조선이 근 5백 년 동안 경험하지 못한 절체절명 위기,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국가의 생존이 위기에 몰린 시기였다.

 

 

 

 

순조가 즉위한 이래 약 60여 년 동안 조선은 외척세력의 세도정치로 백성의 삶은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망국(亡國)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중앙정부와 지방 관리, 양반계층의 사리사욕과 부정부패, 가혹한 횡포 등으로 백성은 벼랑 끝에 몰려 있었고, 조선은 붕괴하기 일보 직전에 놓여 있었다.

 

 

세도정치가 판을 치면서 여러 차례의 민란이 발생한다. 

조선 후기를 민란의 시대라 부르는 만큼 조선이 망국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말한다.

 

 

더욱이 19세기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다투어 식민지를 개척하던 때였다.

조선도 예외 없이 서구 열강의 도전을 받았고, 내적으로 붕괴 직전까지 와 있던 조선은 외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는다. 흥선대원군은 근 500년 동안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절체절명의 상황인 누란(累卵)의 위기 앞에 홀로 서 있었다.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병인양요(1866년, 고종 3)와 신미양요(1871년, 고종 8)를 거치면서 서구 세력을 배척하는 이른바 쇄국정책(통상수교거부정책)과 척화비를 건립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여러 정책 중에는 성공한 정책과 실패한 정책이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곪을 대로 곪아 터진 조선을 개혁하고자 삼정의 개혁, 당파를 초월한 인재등용, 법제확립, 비변사 혁파, 서원혁파, 경복궁재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통상수교 거부한 쇄국정책과 척화비 건립 등이 있다. 

 

 

 

혹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실패한 정책 중에 당대 일부 사람과 후대의 학자는 특히 쇄국정책과 척화비 건립을 비판한다.

흥선대원군이 능동적으로 문호를 개방해 서구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이 근대화를 좀 더 빠르고 수월하게 이루었을 것이라는 이유다.

 

 

그러나 당시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은 단순히 통상적인 수교와 선진문물만 전해주고 끝내지 않았다.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 개척을 전제로 문호개방을 요구하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실각하고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는 강화도조약(1876년)을 강압적으로 맺는다.

문호개방의 통상조약인 강화도조약으로 조선(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여타 서구 제국주의는 문호개방이라는 미명아래 일본 제국주의보다 먼저 식민지 정책을 썼다.

서구 제국주의에 먼저 문호를 개방하였다면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가 아닌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것이다.

 

 

 

 

미국의 무력시위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한 것이 아니고 단지 문호를 개방시키려 했다고 하지만, 1905년 미국과 일본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보면 미국은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알 수 있다.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화했고 일본의 대한제국(조선) 식민지 정책을 지지했다. 

 

 

 

 

 

 

 

 

 

 

 

 

   

 

흥선대원군은 미국의 침략전쟁인 신미양요를 전후하여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배척하는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한다. 흥성대원군은 백성이 잘 볼 수 있도록 조선 팔도 요지 200여 개소에 척화비를 건립했다.

 

  

조선은 60여 년의 세도정치로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민란이 발생하는 등 정치적, 사회적, 외교적으로 내우외환의 혼란기였다. 

당대와 후대의 학자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쇄국정책과 척화비 건립 등 여러 정책의 공과(功過)를 평가하기도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 내우외환으로 망국의 벼랑 끝 위기에 직면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큰 파도 쇄국정책과 척화비 건립을 선택하였다. 

 

 

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 병인년(1866)에 짓고 신미년(1871)에 세우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