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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임오군란, 제물포조약과 갑신정변

by 도생(道生) 2016. 12. 30.

민씨 일파의 전횡과 신식군대(별기군)와 구식군대 차별로

1882년(고종 19)에 일어난 군사정변 임오군란(壬午軍亂),

임오군란의 피해보상을 빌미로 일본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킨 제물포조약,

급진개화파의 삼일천하 갑신정변(甲申政變)

 

 

 

 

 

 

 

 

 

 

 

 

 

 

조선 후기 외척세력의 세도정치는 1800년 즉위한 순조로부터 헌종, 철종, 고종으로 이어졌다.

경주 김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가 권력을 전횡하며 조선을 망국의 길로 내몰았다.

 

 

조선 후기는 외척세력의 세도정치로 조선이 껍데기만 남아 있던 때였다.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었던 조선이 제국주의 열강에 급속하게 문호를 개방하면서 혼란의 시기였다.

조선이 내우외환의 혼란 속에서 망국의 길을 가던 19세기 세계사의 큰 흐름은 왕조시대(봉건체제)가 마감하고 근대사회로 변모하고 있었다.

 

 

 

임오군란, 제물포조약, 갑신정변을 각각 하나의 사건과 또는 세 사건을 연속성으로 보기도 한다.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군사정변(軍事政變)이라고도 한다.

1882년 임오군란을 핑계로 조선과 일본이 맺은 제물포조약은 조선이 망국으로 가는 단초가 된다.

1884년 김옥균, 박용효 등이 주도한 쿠데타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 한다.

정변(政變)은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국을 주도한 주체가 바뀌는 정치상의 큰 변동을 말한다.

 

 

 

 

 

 

 

 

 

 

 

 

 

 

임오군란은 중전 민씨와 민씨 일파가 매관매직과 부정부패 등 권력을 전횡하면서 발생한 군란(軍亂)이다.

조선 조정은 일본군대를 모방한 신식군대(별기군)를 창설하고 구식군대와 신식군대를 차별한다.

 

신식군대(별기군)가 군량이 넘쳐나고 대우를 잘 받지만, 구식군대는 13개월 동안 군료(軍料)도 받지 못했다.

겨우 한 달분으로 받은 군료에는 모래와 겨 등이 섞여 있었고, 군료의 양도 절반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중전 민씨와 민씨 일파가 조선을 망하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이다.

혹자는 임오군란을 흥선대원군이 뒤에서 조종했다고도 한다.

임오군란의 원인 제공자는 중전 민씨 민씨 일파이며, 흥선대원군은 당시의 상황을 이용하여 정권을 다시 잡았다.

 

 

중전 민씨가 도망가면서 행방불명되자 흥선대원군은 국장(國葬)을 선포한다.

임오군란 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 민씨 일파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면서 흥선대원군은 한 달 남짓 만에 실각하고 청나라로 끌려간다. 민씨 일파가 끌어들인 청나라 군대로 말미암아 조선은 정치, 경제, 외교 등 여러 분야에서 청나라의 간섭을 받는다.

 

 

 

 

임오군란 때 일본공관이 공격받고, 일본인이 피해를 봤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책임자 처벌과 사과, 피해보상에 병력 파견 등을 요구하면서 1882년 7월 17일 일본과 조선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한다. 조선은 강화도조약도 그랬지만, 제물포조약 때도 무력시위한 일본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강화도조약으로 경제적 문호를 개방하여 혼란을 자초한 조선은 제물포조약으로 일본군대의 주둔을 허용하면서 정치, 외교, 군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간섭을 받으며 멸망의 길을 걷는다.

 

 

 

 

 

 

 

 

 

 

 

 

 

 

1884년 10월 17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급진개혁파가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이다.

다른 말로 역모사건이다.

 

 

외세를 물리친다고 하면서 갑신정변을 주도한 세력은 외세 일본 제국주의를 끌어들였다.

나라를 파탄으로 몰고 간 민씨 일파 처단과 청나라와 종속관계를 청산하여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자는 명분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혁과 개방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던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급속한 개화를 원했으나 실제 쿠데타를 위한 철저한 준비가 없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대의 빠른 대처와 일본군대의 배신으로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세력이 발표한 80여 개 조항의 혁신정강은 개혁적인 내용이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한 이후 박영효 등은 친일파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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