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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황사영 백서 사건과 천주교 배론성지

by 도생(道生) 2016. 12. 25.

외세를 끌어들이려던 역모사건 황사영의 백서 사건과 충청북도 제천의 천주교 배론성지

 

 

 

 

 

 

 

 

 

 

 

 

 

 

 

충북 제천시에 있는 배론성지는 천주교(가톨릭)의 순교성지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외세를 끌어들여 조선을 전복하려 한 황사영의 백서(帛書)가 발견된 역모(逆謨)의 산실이다. 

 

 

서양에서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온 서학(西學, 천주교)은 성리학적 이념의 조선사회체제를 붕괴할 수도 있었다.

당시 조선은 국가의 기강과 사회의 윤리도덕을 파괴하는 서학을 사학(邪學)으로 규정했다.

 

 

 

정조대왕 15년(1791)에 조선의 사회질서를 혼란케 한 서학(西學, 가톨릭) 신도 윤지충과 권상연이 처형됐다.

1800년 6월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 벽파가 국정의 주도권을 잡았다.

정조대왕 재위 시 조정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노론 시파와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남인 세력 제거에 들어간다.

 

 

조선의 조정 신료들까지 사학(천주교)을 믿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조선의 중심에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신유박해는 단순히 당파 간의 권력투쟁만이 아니며, 조선의 체제도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

대리청정한 정순왕후의 하교를 시작으로 채제공, 정약용 등이 남인의 핵심 인물들이 줄줄이 숙청된다.

 

 

1801년(순조 1) 1월 10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사학(邪, 천주교)을 엄금하라는 하교를 내린다.

천주교 4대 탄압과 박해 중 첫 번째 신유박해가 시작됐다.

 

 

 

 

 

 

 

 

 

 

 

 

 

 

정조대왕을 최측근에서 보필했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 집안이다.

 

다산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부인이 3명이다.

첫째 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이 장약현이고, 둘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이다.

정약현의 부인은 이벽의 누이다. 이벽(1754~1786)조선 천주교회 창립에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약현의 큰딸 정난주(1773~1848)가 황사영의 아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4형제 중 막내이며 첫째 형 정약현(1751~1821), 둘째 형 정약전(1758~1816), 작은형 정약종(1760~1801)이다.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되었고, 셋째형 정약종은 처형되었다

조선인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승훈(1556~1801)은 정약용의 매형이다.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서양 가톨릭 선교사 주문모(벨로조) 야고보 신부는 정순왕후의 사학(천주교) 엄금의 하교가 내리자 청나라로 피신하기 위해 도망가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3월 12일 의금부에 자수한다.

 

우리말에 서툴렀던 주문모 신부는 글을 써서 자신의 출생과 조선 입국과정, 조선인과 교류한 상황 등을 추국에서 밝힌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는 영조의 손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부인과 며느리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밝혔다.

이때문에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가 사사된다.

 

 

 

 

조선왕조 순조 1년(1801)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가톨릭 신자 황사영은 동료들과 충청도 제천의 토굴로 피신한다.

외세를 끌어들여 조선을 전복시키는 반란내용이 담긴 밀서, 이른바 황사영의 백서를 작성한다.

천주교에서 배론성지라 말하는 제천의 토굴에서 황사영은 비단에 1만 3천여 자의 장문의 글을 쓴다.

본래 청나라에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관군에 발각되었다.

 

 

 

 

 

 

 

 

 

 

 

 

 

 

 

황사영이 백서를 쓴 천주교 배론(舟論)성지는 토굴이다.

황사영의 백서(帛書)는 길이 62cm, 넓이 38cm의 흰 비단에 1만 3천여 자의 글이 쓰여 있다고 해서 백서(帛書)라 한다.

 

황사영의 백서에는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처형, 조선 천주교인 탄압과 순교 등이 기록되어 있고, 천주교가 조선에서 자유롭게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황사영이 제시한 세 가지 방안은 이른바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대역(大逆)죄가 되는 내용이다.

 

 

황사영은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 크게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청나라 황제가 조선을 압박할 것, 국경지역 안주에 무안사(撫按司)를 설치해 청나라가 조선을 통치할 것, 서양의 큰 배 수백 척에 5~6만 명의 군사를 보내 조선을 압박해 달라는 내용이다.

 

 

 

황사영의 백서가 발각되면서 역모사건이 되어 황사영은 26살의 젊은 나이에 처형됐다.

1894년 의금부는 예전에 압수되어 보관되어 있던 문서를 파기하다가 황사영의 백서가 발견됐다.

프랑스 출신의 뮈텔 주교는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의 신자 자격을 박탈(출교)한 인물이다.

 

 

 

황사영의 백서 원본은 뮈텔 주교(1854~1933)에게 전해졌고, 뮈텔 주교는 황사영의 백서를 불어로 번역했다.

천주교 뮈텔 신부는 황사영의 백서에 나타난 방안이 너무나 위험천만한 것이고, 음모 대부분이 공상적이며 조선정부가 황사영을 엄벌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천주교 측에서 보면 황사영은 순교자이며 제천의 토굴 배론은 성지다.

그러나 조선 정부와 백성이 바라보는 황사영은 만고역적이며, 배론은 역모의 산실이다.

 

 

 

 

 

혹자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와 황사영의 백서사건을 두고 자유, 평등, 평화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런 가치를 내세운 특정 종교는 아메리카 원주민 6천 만 명 이상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원주민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혼혈인종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바로 황사영의 백서사건을 전후하여 이른바 대항해 시대(15~18세기)지구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정조대왕은 백성 누구나가 서학(천주교)을 신앙할 수 있는 종교적 자유를 준 것은 아니고, 단지 서학(천주교) 활동을 묵인했을 뿐이다. 윤지충과 권상연 사건(1791년, 신해박해)처럼 서학(천주교)이 사회 문제화 되었을 때는 가차 없이 단죄했다.

 

 

 

 

 

 

 

 

 

 

 

 

 

정조대왕은 1788년(정조 12)에 이미 서학(가톨릭)을 사학(邪學)으로 규정했다.

 

 

『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8월 6일(1788년)

"정학(正學)이 밝아져서 사학(邪學)이 종식되면 상도(常道)를 벗어난 이런 책들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사람들이 그 책을 연(燕), 초(楚)의 잡담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 그러니 근원을 찾아 근본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바로 급선무에 속한다....

 

그 책을 불사르라고 청한 말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만약 한 책이라도 빠뜨리는 것이 있을 때 도리어 법과 기강을 손상할 것이다. 그리고 이 학설이 양(楊), 묵(墨), 노(老), 불(佛)과 달라 나온 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그 전파가 넓지 않으니, 다만 집에 간직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물이나 불에 던져 넣도록 하고, 명을 어기는 자는 드러나는 대로 심문해 처리하라.

 

사대부 중에 한 사람도 오염되는 이가 없으면 화복설(禍福說)에 흔들린 어리석은 백성도 스스로 깨닫고서 깨어날 것이니, 조정에서 이 일에 많은 힘을 쓸 필요가 없다. "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2월 26일(1801년)

....죄인 황사영은 여러 번 이름이 국초에 나왔으나, 기미를 알고 도피하였으므로 포청으로 하여금 염탐해서 체포하게 하였다....

 

 

순조 1년 10월 3일(1801년)

·우포청에서 아뢰기를

"사학(邪學)의 망명죄인(亡命罪人)을 충청도 제청 땅에서 포착하여 의금부로 이송하였습니다."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10월 5일(1801년)

좌포장 임율과 우포장 신응주가 사학죄인 황사영의 휸서를 가지고 합문 밖에 나아오니, 들여보내라고 명하여 살펴본 후에 국청에 내리었다.

 

죄인 황사영은 사족(士族)으로서 사술에 미혹됨이 가장 심한 자였는데, 의금부에서 체포하는 처음에 기미를 미리 알고 망명(亡命)하여 혹은 상복을 입고는 성명을 바꾸고 혹은 토굴에 숨어서 종적을 감추어 반년이 지나기에 이르렀다. 포청에서 은밀히 염탐하여 지금에야 제천 땅에서 붙잡아 그의 문서를 수색하니 백서(帛書)가 있는데, 장차 북경의 천주당에 통하려고 한 것이다.

 

서폭에 꽉 찬 흉악하고 참람한 말은 주문모 이하의 여러 죄인이 복법(伏法)되었다는 일을 서양인에게 상세히 보고하려 한 것으로서, 그중에 세 조항의 흉언이 있는데,

하나는 황지(皇旨)를 꾀하여 얻어서 조선에 고유하여 서양인을 가까이 교제하도록 함이었고,

하나는 안주에 무안사를 열어 친왕이 국생을 감시하고 교훈을 모으도록 명하게 하여 틈을 타서 행동하려 함이었고,

하나는 서양국에 통하여 큰 선박 수백 척에 정병 5, 6만 명을 꾸며 보내고 대포 등 이해되는 병기를 많이 싣고 와서 동국을 깜짝 놀라게 하여 사교가 행해지도록 함이었다.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1월 10일(1801년)

선왕(정조)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치성해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모습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 마치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져들어 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와 수령은 자세히 효유하여 사학을 하는 자들로 하여금 번연히 깨우쳐 마음을 돌이켜 개혁하게 하고, 사학을 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징계하여 우리 선왕께서 위육하시는 풍성한 공렬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처럼 엄금한 후에도 개전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 종사할 것이다.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을 시행하여 진멸함으로써 유종(遺種)이 없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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