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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세종대왕과 최고의 인재집단 집현전

by 도생(道生) 2017. 1. 7.

세종대왕의 인재 등용과 양성, 최고의 인재(人材) 집단 집현전(集賢殿)

 

 

 

 

 

 

 

 

 

 

 

 

 

고려는 연영전(延英殿)을 두어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고 학문 연구를 하였다.

고려 17대 황제 인종(1109~1146, 재위 1122~1146)에 이르러 연영전을 집현전(集賢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건국 초기는 건국 공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고려 출신 성리학자도 많았고 집현전도 있었지만, 유명무실하였다.

세종대왕은 최고의 인재집단이 모인 집현전을 학문연구를 넘어 백성의 질적이고 양적인 삶을 향상하며, 조선의 미래를 열어가는 국정운영의 산실로 만들었다.

 

 

 

 

조선 2대 왕 정종 1년(1399) 3월 대사헌 조박이 임금께 집현전을 활성화할 것을 건의하였다.

정종 2년(1400) 1월에 집현전을 보문각(寶文閣)으로 고쳤다.

 

 

태종 17년(1417) 사간원에서 치도(治道)에 대한 몇 가지 건의 중에 유명무실한 현전을 개편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흐지부지되었다.

 

1419년 좌의정 박은이 집현전을 활성화하여 인재를 발굴하자는 방안을 올리자 세종대왕은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후 집현전 활성화 방안에 대한 후속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420년 세종대왕이 직접 나서서 집현전을 명실공히 최고의 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하는 최고의 인재집단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미래를 위해 학문연구, 인재양성과 등용, 서적 편찬, 왕의 자문기관으로서 최고의 인재집단 집현전을 만든다.

집현전 최고직인 영전사는 정 1품 2명, 대제학은 정 2품 2명, 제학은 종 2품 2명, 부제학은 정3품 1명 등 최고위 정1품에서 최하위 정 9품까지 폭넓고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다.

 

 

 

 

 

 

 

 

 

 

 

 

 

세종대왕은 최초의 집현전 수장으로 좌의정 박은(1370~1422)과 우의정 이원(1368~1429)을 영전사로 임명한다.

류관(1346~1433), 탁신(1367~1426), 변계량(1369~1430), 이수(1374~1430), 윤회(1380~1436), 어변갑(1381~1435), 신장(1382~1433), 김자(?~1428), 정인지(1396~1478), 최만리(?~1445), 최항(1409~1474), 하위지(1412~1456), 박팽년(1417~1456), 강희안(1417~1464), 신숙주(1417~1475), 이개(1417~1456), 성삼문(1418~1456), 김문(?~1448), 이선로(?~1453), 김종리(?~?), 유성원(?~1456) 등 수많은 사람이 조선 최고의 인재집단 집현전에서 근무하고 임금을 보좌하는 한편 인재등용과 양성, 서적 편찬 등을 하였다. 

 

 

 

 

 

집현전에서는 임금의 자문 담당, 강의를 듣고 토론하는 경전과 왕세자의 교육을 맡는 서연(書筵), 법제, 의례, 정치제도 등에서 미비한 점을 보완하였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조선 최고의 인재집단으로 만들어 역사, 지리, 의례, 농사, 문화,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조선 최고의 석학들로 구성된 인재집단 집현전은 훈민정음 반포의 산실이었며, 또한 적극적으로 반대한 곳도 집현전이었다.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며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집현전을 폐쇄했다.

단종복위사건에 집현전 출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연류되자 1456년 집현전을 폐쇄해 버렸다.

 

세종대왕의 치세에 큰 역할을 하였던 조선 최고의 인재집단 집현전이 1456년 폐쇄되었고, 300여 년이 흐른 1776년 정조대왕에 의해 규장각은 인재등용과 개혁정치의 산실로 부활한다.

 

 

 

 

 

 

 

 

 

 

 

 

정종실록 1권, 정종 1년 3월 13일(1399년)

처음으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집현전에 모이게 하였다.

대사헌 조박이 상언하였다.

"집현전은 한갓 그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으니, 청컨대 옛 제도를 회복하여 서적을 많이 비치하고 예문교서(藝文校書)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되, 문신 4품 이상으로서 관각(館閣)의 직책을 띤 자는 날을 번갈아 모여서 경적(經籍)을 강론하게 하여 고문(顧問)에 대비케 하소서."

 

임금이 심히 허락하고, 좌정승 조준·예천백·권중화, 대사헌 조박, 중추 권근·이첨으로 제조관을 삼고, 문신 5품 이하로 교리에 충당하고, 7품 이하로 설서 정자에 충당하였다.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1월 19일(1417년)

인재는 국가의 기용(器用)이므로 미리 양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르는바 수문전(修文殿) 집현전(集賢殿) 보문각(寶文閣) 등은 그 이름만 있을 뿐이요, 그 실상이 없으니, 바라건대, 나라 안에 집현전을 창립하고 관각의 제학 중에서 글을 주관할 만한 자 수원(數員)을 택하여 제조로 삼으소서.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3월 16일(1402년)

집현전에 새로 영전사 두 사람을 정1품으로, 대제학 두 사람을 정2품으로....

처음에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수문전, 집현전, 보문각의 대제학과 제학은 2품 이상으로 임명하고, 직제학 직전 직각은 3, 4품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러나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이 오직 문신으로 관직을 주었을 뿐이었는데, 이제에 이르러 모두 폐지하고, 다만 집현전만 남겨 두어 관사를 궁중에 두고,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이에 채워서,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였다.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1월 25일(1423년)

"정치하는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선무이다....."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6일(1456년)

(임금이) 명하기를

"집현전을 파하고, 경연을 정지하며, 거기에 소장하였던 서책은 모두 예문관에서 관장하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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