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무학대사의 계룡산 신도안 천도

by 도생(道生) 2017. 1. 4.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무학대사

무산 계룡산 신도안(新都內) 천도(遷都) 계획

 

 

 

 

 

 

 

 

 

 

 

 

 

삼봉 정도전(1337~1398)과 무학대사(1327~1405)는 조선 건국의 쌍두마차다.

태조 이성계는 삼봉 정도전에게 스승의 예로 대했고, 무학대사에게도 스승의 예로 대했으며,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 역할도 했다. 무학대사는 고려말 공민왕 때 왕사(王師)를 지낸 고승 나옹 화상(1320~1376)의 제자다.

 

 

 

 

새 나라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기운이 다한 개성을 떠나 도읍을 새로운 곳으로 옮기려고 준비한다.

이성계는 고려의 망령이 남아 있는 곳으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도읍을 옮기려 했다.

 

1392년 7월 17일에 왕위에 오르고, 한 달도 안 된 8월 13일에 한양으로 천도(遷都)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조정에서 논쟁으로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 신도안으로 도읍을 천도하다가 한양으로 변경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계룡산 신도안이 예로부터 천하의 길지로 꼽혔던 곳이었지만, 태조 이성계가 천도 도읍지로 첫 번째 정한 곳은 한양이 맞다.

조선의 도읍지 천도과정은 한양에서 계룡산 신도안, 다시 한양으로 결정되었다.

 

 

 

 

 

 

 

 

 

 

 

 

 

지지부진한 도읍지 천도 문제를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이 바로 무학대사다. 

무학대사는 수태극(水太極) 산태극(山太極)의 계룡산 신도안을 도읍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의 도읍을 옮기기 위해 무학대사와 이성계는 직접 계룡산 신도안 일대를 돌아보았다.

 

 

 

 

태조 이성계와 함께 계룡산 신도안을 새로운 도읍으로 결정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계룡산 신도안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 약 10개월 남짓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하륜의 반대로 계룡산 신도안 천도는 중지되고 만다.

 

 

 

 

조선은 새로운 도읍을 계룡산 신도안에서 다시 한양으로 정한 후 왕궁을 어느 곳, 어느 방향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대립한다. 정도전, 무학대사, 하륜은 바로 왕궁의 방향을 결정짓는 주산(主山)을 놓고 각기 서로 다른 주장을 다.

 

정도전은 백악산(삼각산, 북한산, 북악산)주산론, 하륜은 안산(무악산)주산론, 무학대사는 인왕산주산론을 주장했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현재의 삼각산(백악산)이 주산으로 결정되었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3일(1392년)

도평의사사에 명령을 내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였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3일(1392년)

시중 배극렴, 조준 등이 온천에 나아가서 아뢰었다.

"가만히 보건대, 한양의 궁궐이 이룩되지 못하고 성곽이 완공되지 못하여서, 호종하는 사람이 민가를 빼앗아 들어가게 됩니다.

기후는 점차 추워 오고 백성은 돌아갈 데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사를 배치하기를 기다려서, 그 후에 도읍을 옮기도록 하소서."

임금이 옳게 받아들였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19일(1393년)

임금이 송경(개성)을 출발하여 계룡산의 지세를 친히 보고 장차 도읍을 정하려고 하니, 영삼사사 안종원, 우시중 김사형, 참찬문하부사 이지란, 판중추원사 남은 등이 따라갔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1일(1393년)

임금이 말하기를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역시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을 받은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인데, 지금 내가 계룡산을 급히 보고자 하는 것은 나 자신 때에 친히 도읍을 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후사 될 적자가 비록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도읍을 옮기려고 하더라도, 대신(大臣)이 옳지 않아도 저지시킨다면, 후사가 될 적자가 어찌 이 일을 하겠는가?"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3월 24일(1393년)

계룡산에 새 도읍을 정하였는데, 기내의 주현, 부곡, 향소가 모두 81이었다.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12월 11일(1393년)

대장군 심효생을 보내어 계룡산에 가서 새 도읍의 역사를 그만두게 하였다.

경기 좌, 우도 도관찰사 하윤(하륜)이 상언하였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 서면, 북면과는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臣)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이 이른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13일(1394년)

임금이 여러 사람의 말로써 한양을 도읍으로 결정하였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24일(1394년)

".... 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전조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한 나라를 차지하시어 이미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왕지(王旨)로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0월 25일(1394년)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