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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해시계 물시계(자격루) 혼천의를 개발한 장영실

by 일신우일신 도생 2017. 1. 5.

조선 세종 때 과학자로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 간의대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 장영실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의 치적을 뒷받침해준 과학자이며 발명가인 장영실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왕조시대에 관노의 아들로 태어나 해시계, 물시계(자격루), 혼천의, 간의대 등의 개발에 참여하여 종3품의 대호군(大護軍)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세종대왕만이 장영실과 같은 노비출신을 관직에 제수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인사는 아니었지만, 관직이 장영실보다 더 높이 올라간 인물도 있다.

 

 

 

장영실의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장영실은 동래현(현재의 부산) 관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았다고 한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의 사람이고, 어머니는 관노(기생)이었다는 것만 알려졌다.

 

 

 

 

 

 

 

 

 

 

 

 

 

 

간의대,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자격루) 등의 개발에 참여한 장영실은 조선 초기 최고의 과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세종대왕과 장영실을 비롯한 인재들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로서 임금의 권위를 내세우는 천문학(역법)뿐만 아니라, 백성의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만들었다.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했던 세종대왕은 자신이 구상한 일에 필요한 조건과 능력이 있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했다.

조선 초기 과학자이며 발명가인 장영실은 세종대왕의 혜안이 없었다면 역사 속에 묻힐 수도 있었던 인물이다.

그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고 해도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당시 세종대왕의 파격적인 인재등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대왕이 장영실의 재주를 아껴 궁궐로 데려왔다고만 전하고,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장영실이 언제 관노(노비)에서 면천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1422년(세종 4) 1423년(세종 5) 무렵에 세종대왕이 종 5품의 무록관(無祿官, 급여가 없는 관원) 상의원 별좌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이조판서 허조는 관노인 기생의 자식에게 관직을 줄 수 없다고 하였다.

반면 병조판서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라고 찬성 의사를 표명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세종대왕은 대신들이 의논하게 하였고, 논의 끝에 좌의정 유정현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고 하여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에 임명하였다.

 

 

 

 

장영실이 세종대왕의 명으로 혼천의, 간의대, 해시계, 물시계(자격루) 등을 개발하며 약 20년 활동했다.

세종대왕이 타는 수레가 부서지면서 곤장을 맞고 삭탈관직 되면서 이후의 기록은 없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뛰어난 과학자가 임금의 가마를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혹자는 장영실의 삭탈관직, 또 그가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이유를 조선의 천문기술 개발로 말미암아 명나라와 외교 문제로 비화하자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세종실록』 80권, 세종 20년 1월 7일(1438년)

흠경각(欽敬閣, 자동으로 작동되는 천문 물시계 옥루가 있던 건물)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이 건설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며,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3월 16일(1442년)

대호군(大護軍) 장영실이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수레)를 감조(監造)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 4월 27일(1442년)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를 감독하여 제조함에 삼가 견고하게 만들지 아니하여 부러지고 부서지게 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1백 대를 쳐야 할 것이며, 성공직장 임효돈과 녹사 최효남도 안여를 감독하여 제조하면서 장식한 쇠가 또한 견고하게 하지 아니했으며, 대호군 조순생은 안여가 견고하지 않은 곳을 보고 장영실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으니, 모두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80개를 쳐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장영실에게는 2등을 감형하고, 임효돈과 최효남에게는 1등을 감형하며, 조순생에게는 처벌하지 않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 5월 3일(1442년)

임금이 박강, 이순로, 이하, 장영실, 임효돈, 최효남의 죄를 가지고 황희에게 의논하게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 이 사람들의 죄는 불경에 관계되니, 마땅히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곤장을 집행하여 그 나머지 사람들을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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