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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정몽주 단심가와 이방원 하여가

by 도생(道生) 2017. 1. 3.

정몽주 단심가(丹心歌)와 이방원 하여가(何如歌)

 

 

 

 

 

 

 

 

 

 

 

 

 

 

이방원(1367~1422)이 새 나라 창업에 동참하자는 내용을 담은 하여가(何如歌) 시(詩)에 포은 정몽주(1337~1392)는 고려의 신하로 남겠다는 단심가(丹心歌)로 답변했다. 정몽주의 단심가 시(詩)는 그가 고려의 충신임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이다.

 

 

 

이방원의 지시 아래 포은 정몽주는 개성 선죽교에서 죽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인 조선의 3대 왕 태종 이방원에 의해 죽은 지 9년이 지나 복권되고, 충절의 표상이 되어 문묘에 배향된다.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정몽주는 문묘에 배향했고,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의 종주가 되었다.

 

 

이방원은 '하여가'로 물었고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하면서 두 사람의 생(生)과 사(死)는 갈렸다.

정몽주는 사후 불과 9년 만에 간신(姦臣)에서 충신(忠臣)으로, 그것도 자신을 죽인 원수의 손에 의해 뒤바뀐다.

 

 

 

 

고려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정치는 기득권 수구 세력에 의해 무너졌다.

당시만 해도 포은 정몽주는 신진사대부 개혁세력이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을 이성계와 함께 정몽주는 폐가입진(廢假入眞)의 명분으로 우왕에 이어 창왕 폐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공신에 책봉되었다.

 

고려 우왕(1374~1388), 창왕(1388~1389)이 재위할 때 포은 정몽주는 10여 년 동안 성균관 대사성, 문하찬성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새롭게 옹립한 공양왕 때 정몽주는 수문하시중(정승)에까지 오른다.

신진사대부개혁을 외쳤던 고려의 뛰어난 학자, 정치가, 외교가 포은 정몽주가 어느새 기득권세력이 되어 있었다.

 

혹자는 포은 정몽주가 고려왕조를 무너트리면서까지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삼봉 정도전이 새 나라 조선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신권정치는 고려의 충신이라는 포은 정몽주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의 몇몇 왕을 제외한 여러 왕은 신하의 권력이 왕권을 넘어서는 시대를 보냈으며, 심지어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의 시기도 있었다. 

 

 

 

 

고려가 이미 회생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성계 일파는 역성혁명을 주장했고, 포은 정몽주(1337~1392)는 개혁을 통해 고려를 쇄신하는 쪽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힘이 부족했던 포은 정몽주 등의 고려 개혁세력은 절치부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성계가 사냥하다 낙마하는 사고를 당하자 포은 정몽주가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포은 정몽주는 역성혁명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성계의 최측근 정도전, 남은, 조준, 남재, 조박 등을 탄핵하여 유배 보낸다.

   

 

 

 

역성혁명세력이 순식간에 탄핵당하고 자칫하다가는 대역죄를 몰살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이방원은 정도전과 담판을 짓는다. 이방원은 하여가(何如歌)란 시(詩)로 역성혁명에 동참을 호소한다.

이에 포은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절대 저버릴 수 없다는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한다.

 

 

 

 

 

 

 

 

 

 

 

 

 

 

이방원과 정몽주는 하여가와 단심가를 통해서 서로가 함께할 수 없는 사이임을 확인했다.

이방원은 수하 조영규 등을 시켜 정몽주를 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개성 선죽교를 지나던 포은 정몽주는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에게 습격을 당한다.

정몽주가 철퇴를 맞고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설과 상처를 입고 도망가다 다른 곳에서 사망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려 말기는 권력을 가졌거나, 권력을 탐하는 신하에 의해 여러 명의 왕이 교체됐다.

조선 초기 역시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태종 이방원 역시 하극상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태종 이방원은 자칫 잘못하면 이와 같은 하극상이 언제 어느 때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을 염려했다.

 

또, 태종 이방원은 정적이었던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을 대역죄로 죽이고 그의 흔적을 지워나가면서, 그와 맞수였던 포은 정몽주를 충신의 반열에 올린다. 

 

 

 

 

태종 이방원은 나라(임금)를 배신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대상이 필요했고, 포은 정몽주를 만고의 충신으로 절개를 지킨 인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선 건국 초기에 포은 정몽주는 간신이며 역적이었다.

 

태종 이방원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이방원의 지시로 조영규 등이 정몽주가 죽였기 때문에 정몽주 이름 석자를 임금 앞에서 함부로 입에 올린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 문하에서 수학한 권근이라 할지라도 임금(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충신으로 복권해야 한다고 권고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는 태종 이방원이 권근을 내세운 지극히 정치적 선택으로 이방원의 작품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정황이다.

 

 

 

 

조선 2대 왕 정종이 1400년 11월 11일에 세제(世弟) 이방원에게 선위했다.

 

『정종실록』 6권, 정종 2년 12월 22일(1400년)

"무릇 과인(태종 이방원)의 잘못과 좌우의 충성하고 간사한 것과 정령의 잘되고 못된 것과 민생의 이해(利害)와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극진히 말하여 숨기지 마라. 말이 채용할 만하면 내가 상을 주겠고, 말이 혹 맞지 않더라도 또한 죄를 가하지 않겠다."

 

 

 

 

 

 

 

 

 

 

 

태종 1년(1401) 1월 14일 참찬문하부사(정 2품) 권근이 태종 이방원에게 6조목의 치도(治道), 즉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권고하였다. 다섯 번째 도리가 바로 절개와 의리를 찬양하여 내세우는 것이다.

 

고려말과 조선 초기에 간신이며 역적이었던 포은 정몽주가 충절의 대명사가 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충(文忠)의 시호까지 받는다. 

  

 

 

태종 이방원 이후 세종을 비롯한 임금들은 이방원의 선택을 그대로 따랐다.

조선 중조 때 조광조의 후학들이 포은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를 요구하였고, 포은 정몽주가 성리학의 종주로 받들어지며 충절의 표상이 되었지만, 칼 찬 유학자 남명 조식을 비롯한 일부 학자는 포은 정몽주를 비판하기도 했다.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 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려보세.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6일(1392년)

전하(이성계)께서.... 몸소 사냥하여 와서 하례하려고 하던 차에, 불행히도 말에서 떨어져 초막에 누워 있었는데, 간신(姦臣) 정몽주는 전하께서 비호해 준 사람인데도 총재가 되어 손수 정권을 잡고는....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26일(1398년)

(삼봉 정도전은)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1월 14일(1401년)

다섯째는 절의(節義)를 포창(褒彰)하는 것입니다.

자고로 국가를 가진 자는 반드시 절의(節義) 있는 선비를 포창하니, 만세의 강상을 굳게 하자는 것입니다....

전조(前朝)의 시중 정몽주가 본래 한미한 선비로 오로지 태상왕(이성계)의 천발의 은혜를 입어서 대배에 이르렀으니....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 11월 7일(1401년)

고려 문하시중 정몽주에게 영의정부사를, 광산군 김악향에게 의정부 찬성사를 증직하였으니, 참찬의정부사 권근의 말을 좇은 것이었다.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4월 3일(1402년)

임금이 말하기를

"정몽주는 향생(鄕生)으로서 장원이 되어 호방(豪放)함이 빌길 데 없었다." 하니

이응이 대답하였다.

"정몽주 같은 분은 중국에도 드뭅니다."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6월 27일(1405년)

임신년 3월에 정몽주가 태상왕(이성계)이 말에서 떨어져 위독할 때를 타서 대간을 시켜 조준과 남은, 정도전, 윤소종, 남재, 오사충, 조박 등을 탄핵하여, 붕당을 만들어서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고 지적하여 모두 외방으로 귀양보냈다가, 이내 수원부로 잡아 올려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4월에 주상(이방원)께서 조영규로 하여금 정몽주를 쳐 죽이게 하고, 조준이 죽음을 면하고 찬성사에 복직되었다...

 

 

 

 

『중종실록』 29권, 중종 12년 8월 7일(1517년)

당초에 생원 안치겸, 안정 등이 관중에 들어가서 맨 먼저 정몽주, 김굉필을 종사할 것을 주장하여 그날로 의논을 정하려 하였으나, 유생들이 '정몽주는 부끄러울 것이 없겠으나 김굉필은 두드러진 일이 없으므로 문득 논의할 수 없으니, 차차 듣고 보아서 의논해야 하겠다.' 하여, 다들 불쾌한 기색을 품으므로 안정 등이 감히 강제하지는 못하였으나 크게 성을 내고 공손하지 않은 말을 하였다.

 

그 뜻은 김굉필을 종사하게 하고 그것을 빙자하여 당(黨)을 세우자는 데에 있었는데, 처음부터 정몽주를 위하여 계책을 세운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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