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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여성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by 도생(道生) 2017. 2. 26.

대한의 자주독립을 외치다 순국한 여성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1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유관순 열사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상징처럼 되어있다.

상당수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의 무관심 속에 잊힌 존재였다가 근래에 들어 발굴되기 시작했다.

유관순 열사와 일부 여성독립운동가를 제외하면, 일제강점기 대다수 여성독립운동가는 성인여성이었다.

 

 

 

유관순 열사보다 더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한 여성독립운동가도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독립투사를 지원한 여성독립운동가도 있었으며, 머나먼 이국땅에서 언제 올지 모를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험난한 난관을 헤쳐가면서도 군사훈련을 받고 무장투쟁에 직접 뛰어들어 순국하신 여성독립운동가도 있다.

 

 

 

 

 

 

 

 

 

 

 

 

전국적으로 약 3개월에 걸쳐 수백만 명이 1919년 3.1만세 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일제의 총칼 아래 목숨을 잃었다.

 

광복 후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의 앞잡이가 된 친일파를 단죄하는 반민특위가 제대로 활동도 못 하고 해산되었다.

 

 

 

 

혹자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 교육 등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를 장악한 친일파 세력의 지지를 받은 정권과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이 여러 명의 민족 영웅을 만들어 냈는데, 여성으로서는 신사임당과 여성독립운동가의 상징이 된 유관순 열사 등을 우상화했다고 주장한다.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최고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최고 권력자의 부인을 일제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만든 신사임당과 동일시하는 우상화 작업을 하였고, 특정 학교는 아우내장터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순국한 여성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가 마치 자기 학교 출신인 것처럼 내세우며 유관순 열사의 항일운동을 극대화하고 우상화하면서 특정 학교 출신들의 친일행적을 덮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유관순 열사는 1919년 아우내장터의 3.1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일제의 고문을 받고 순국한 여성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이며, 18세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1920년 순국했기 때문에 특정 대학과는 전혀 상관없다.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이래 약 10년 동안 강력한 무단정치를 펼치면서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식민지교육을 했지만, 자주독립을 향한 열망만은 꺾을 수 없었다.

  

 

희망의 불빛은 사라지고 절망의 그늘에 갇혀 살던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유관순 열사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며 무장투쟁을 한 여성 독립투사는 아니지만, 고등학생 신분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여성독립운동가임은 틀림없다.

 

 

 

 

 

 

 

 

 

 

 

 

 

한참 친구들과 어울리며 공부할 18~19세의 유관순 열사는 남자들도 견디기도 힘든 모진 고문을 참아내며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유관순 열사는 자신의 청춘과 목숨까지도 기꺼이 희생하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향한 불굴의 의지로 많은 사람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주었다. 

 

 

 

3.1만세 운동은 단기간에 독립을 쟁취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아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임으로써 한민족 모두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반대하고 대한의 자주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기미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면서 3.1만세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1919년 3월 1일부터 5월까지 약 3개월간 지속한 비폭력 만세운동은 일제의 강력한 무력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약 2백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는 1902년 음력 11월 17일 충청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태어났다.

유관순 열사는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서 태어난 3남 2녀 중 셋째이며 둘째 딸이다.

 

1915년 공주 영명학교 보통과 2년을 마치고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했다.

1918년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이화 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유관순 열사의 초, 중등학교 과정은 여러 주장이 있다.)

 

 

 

18세가 되던 1918년 이화학당 고등보통학교(現 이화여자고등학교) 재학 중 3.1만세 운동에 가담하여 체포됐다가 풀려났다.

3.1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내려온다.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 열사는 가족과 친구, 친지와 지인, 인근 지역 마을 사람들까지 설득하여 계획을 세우는 등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준비한다.

 

 

 

 

 

 

 

 

 

 

 

 

1919년 3.1만세 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는 18세의 고등학교 학생 신분이었고, 어린 여학생의 신분으로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벌어진 3.1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아우내장터에서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약 3천 명의 군중들이 만세운동 시위를 하였다.

아우내장터에서 비폭력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무자비하게 총칼로 진압했다.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을 비롯하여 수십 명이 죽고 상처를 입었다.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헌병에 체포된 유관순 열사는 일제가 회유와 협박, 모진 고문을 지속할수록 대한의 자주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애국심을 더욱 불타올랐다.

 

공주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관순 열사는 항소하였다.

現 서대문교도소로 이감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감형된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기각된다.

 

 

 

 

 

 

 

 

 

 

 

1919년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형이 3년형인 것일 보면 유관순 열사의 5년형과 감형된 3년형이 얼마나 중형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 제국주의의 헌병대와 경찰 앞에서도 18세의 여학생은 일제가 불법적으로 국권을 침탈했기 때문에 식민통치가 불법이며 대한의 자주독립은 당연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유관순 열사가 중형을 받은 것은 옥중에서도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비폭력 만세운동을 총칼로 진압하면서 사람을 죽이는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1년 6개월의 법정투쟁과 감옥 안에서도 대한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면서 일제의 불의함을 꾸짖었으며, 3.1만세 운동 1년이 되던 때 동료 수감자들을 주동하여 만세운동을 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일제의 계속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19살의 불꽃 같은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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