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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항일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by 도생(道生) 2017. 3. 18.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선 항일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경주 이씨 백사(白沙) 이항복은 오성이란 별칭으로 더 유명하다.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의 9대손이 조선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이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한성판윤과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이 우당 이회영(1867~1932)이고, 다섯째 아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년) 초대 법무 총장과 대한민국(1948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1868~1953)이다.

 

 

 

 

우당 이회영은 19세기 말부터 항일의병에게 자금을 조달해 주었으며, 을사오적 암살을 준비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07년 정미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고종황제를 강제퇴위, 군대 해산, 입법, 사법, 행정 등 내정에 직접 간섭하며 국권을 침탈하려 하고 있었다.

 

 

 

 

 

 

 

 

 

 

 

 

 

1906년 만주 용정에 인재 양성과 항일독립운동가를 더욱 많이 배출하기 위해 신학문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우는 데 동참한다.

 

 

1907년 일제의 방해공작과 이준 열사의 죽음으로 실패로 끝난 헤이그 특사 파견을 기획하기도 한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등 경주 이씨 형제들과 안창호를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가 뜻을 모아 신민회를 결성한다.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민중 계몽을 위해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항일독립단체다.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강제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1910년 12월 서간도에 무장투쟁을 할 항일독립운동가와 인재를 양성하는 무관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던 안명근을 체포한다.

 

일제는 안명근을 체포하면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조작하여 항일독립운동가를 대대적으로 체포한다. 이때 신민회 간부 상당수가 체포되면서 국내 신민회 활동은 사실상 와해한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일제가 무단통치를 시작하자 우당 이회영을 비롯한 6형제와 40여 명의 전 가족은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다. 

 

 

 

 

혹자는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형제들의 행동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모범적인 선각자라고 말한다.

항일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등 경주 이씨 일가는 단순히 사회지도층의 의무와 도덕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해 부귀영화를 버린 것이 아니다.

 

우당 이회영과 그 가족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범주를 넘어 자신의 목숨을 비롯하여 전 가족의 목숨과 전 재산을 항일독립운동에 바친 민족의 귀감이며, 숭고하고 위대한 나라 사랑의 뜻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

 

당시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친일파도 있었지만, 국가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에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우당 이회영 일가는 진실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받친 숭고하고 거룩한 희생이었.

 

 

 

 

 

 

 

 

 

 

 

 

1911년 경학사 설립에 참여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한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서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을 위해 농업, 실업, 교육을 장려하는 한편, 항일독립운동가 양성하여 항일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기 위함이다.

 

1919년까지 국내외를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고종의 망명을 계획하였으나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무위 된다.

 

 

 

우당 이회영은 1919년 3.1만세 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동참하였으나, 임시정부 내에서 의견 차이로 내분이 일어나고 분쟁이 심화하자 블라디보스토크와 베이징, 상하이 등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은 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법무총장이 된다.

 

 

 

 

 

 

 

 

 

 

 

 

 

 

1923년 우당 이회영은 신채호 등과 이른바 아나키스트 운동(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며 독립운동을 이어나간다.

1924년 우당 이회영은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 조직 창설을 후원하였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한 후 항일결사조직 다물단 조직한다.

 

1929년 우당 이회영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하고, 김좌진 장군과 '재만한족연합회' 조직을 만들었다.

 

 

 

 

1931년 우당 이회영은 동지들과 '남화한인연맹' 창설하고, 항일비밀결사조직 흑색공포단 조직한다.

1932년 항일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가던 중 밀정의 밀고로 일제에 체포되어, 여순감옥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다가 11월 17일 그토록 원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66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우당 이회영은 백사 이항복 이후 대대로 정승과 판서를 지낸 명문대가 집안의 후손이다.

우당 이회영과 그 가족 모두는 문벌 가문에 대단한 재력가 집안 후손이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신의 안락과 영화를 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목숨과 집안의 모든 것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다 바친 진정한 애국 충정 지사 집안이다.

 

 

 

경주 이씨 6형제 중 유일하게 생존하여 조국의 광복을 지켜본 성재 이시영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의 부패와 실정을 성토하며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1953년 86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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