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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

by 도생(道生) 2017. 3. 12.

일제가 조작한 조선총독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의 시발이 된 인물 안명근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이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고 조선총독부가 무단통치를 시작한다.

1910년 말 안명근이 군자금을 모집하다 민병찬, 민영설 등의 밀고로 체포된다.

 

 

 

안명근의 체포와 함께 황해도 안악 지방을 중심으로 약 160여 명이 체포된 안악사건(군자금 모금 사건)을 일제 총독부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조작하면서 민족해방운동 인사들을 탄압하면서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으로 확대한 것이다.

일제가 확대, 조작, 날조한 이 사건은 항일애국지사 검거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독립운동을 미리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1910년 안명근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서간도에 무관학교 설립하여 무장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된다.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다 붙잡힌 안명근은 일제가 민족해방운동 인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조작한다. 일제는 안명근을 협박하고 잔인하게 고문한 끝에 허위자백을 받아낸다.

 

 

 

무관학교 설립 군자금 모집을 하면서 안명근을 비롯한 160여 명이 체포된 안악사건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둔갑하면서 일제는 윤치호, 이동녕, 이승훈, 김구를 비롯하여 신민회 간부와 교육자, 종교인 등 민족해방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하던 6백여 명이 검거되는데, 지역적으로는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 사람이 많았다.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검거된 민족해방운동 지도자 6백여 명 중 상당수 인사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고, 105인이 유죄판결을 받아 105인 사건이라 하며 신민회 간부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신민회 사건이라고도 한다.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105인은 항소하며 법정투쟁을 벌인 끝에 징역 5년에서 6년이 확정된 6명을 제외한 99명이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자체가 일제가 조작한 사건이라 많은 애국지사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신민회는 1907년 안창호, 이회영, 김구, 신채호, 박은식, 노백린,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이갑, 유동열, 전덕기 등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애국지사들이 모여 만든 항일단체다.

 

 

 

 

 

 

 

 

 

 

 

 

6백여 명이 체포되고, 1심에서 105인이 유죄판결을 받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에 신민회 간부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군자금을 모금하던 안명근을 체포하면서 일제가 조작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신민회 간부가 체포되고 신원이 노출되면서 신민회의 국내활동이 와해한다.

 

 

 

국내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애국지사들이 노출되면서 사실상 신민회 조직은 해체된다.

일제는 항일애국지사를 지속해서 탄압하는 등 무단통치를 시행하여 국내 독립운동은 위축되고 해외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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