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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

by 도생(道生) 2017. 3. 19.

무장독립투사를 배출한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

 

 

 

 

 

 

 

 

 

 

 

 

 

 

 

 

1905년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압으로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 주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식민통치를 시작한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국지사들이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한 비밀결사조직 신민회를 만든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늑약과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는 등 침략야욕을 가속한다.

 

 

 

1909년 신민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모여 만주에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군 양성 기지를 만들 것을 논의한다.

1910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는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105인 사건, 신민회 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 소속 애국지사들이 대거 체포되었고, 1911년 국내 신민회 조직은 와해되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 이회영 등 6형제와 석주 이상룡 등 많은 애국지사가 만주로 망명한다.

1911년 이회영 6형제, 이상룡, 김동삼, 이동녕 등을 중심으로 서간도(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자치 조직인 경학사를 설립하고,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연다.

 

 

 

 

신흥강습소의 궁극적인 목적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으로서 독립투사를 양성하기 위함으로 일반교과 과목과 함께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정신교육과 군사훈련도 병행했다.

 

현지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자 1912년 통화현 합니하로 자리를 옮기고 경학사를 대신한 자치기구 부민단을 조직하는 한편 중학교 과정과 군사반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해나갔다. 이때부터 신흥무관학교가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으로 거듭 태어났다.

 

 

 

 

 

 

 

 

 

 

 

 

일제의 탄압과 무단정치가 날로 거세지고 서간도가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알려지면서 망명하는 사람이 늘어나 1919년 유하현 고산자로 옮겨갔다. 자치기구 부민단은 한족회로 확대 개편한다.

 

유하현 고산자 신흥무관학교는 장교, 부사관, 특별반 등의 과정을 만들며 새롭게 확장하고 개편하면서 명실상부한 항일 무장 독립투사 양성기관으로서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통화현 합니하의 학교는 분교가 되고, 통화현 쾌대무자에도 분교를 만들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과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면서 1920년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는 문을 닫는다.

일제가 서간도 지역의 항일독립운동가를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양민을 학살한다.

이상룡, 여준 등이 검성중학교, 신창학교 등을 설립하여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다.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는 약 3천 5백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서로군정부의 모태가 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서간도 지역의 자치기구 한족회(경학사, 부민단)의 정치 군사조직 서로군정부는 임시정부 산하의 자치기관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꾼다.

 

 

 

서일, 현천묵 등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 단체 중광단을 만들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항일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중광단은 대한정의부, 대한군정서로 이름을 바꾼다.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조직 서로군정서와 구분하기 위해서 북로군정서로 바뀐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이범석 장군 등 많은 군사 전문가가 북로군정서에 와서 활약한다.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3천 5백여 명의 항일무장독립투사들은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대거 참여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애국지사들은 여러 항일 무장투쟁 조직에도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을 주도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선 애국지사들이 모여 신흥무관학교를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한 분들과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을 했던 분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든 수많은 애국지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형성했으며, 항일독립투쟁사에 큰 획을 그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친일청산과 민족의식 고취, 정통성 회복을 위해 항일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의 상징이었던 신흥무관학교의 이름을 빌려 1947년 신흥전문학원을 설립했고, 1949년 초급대학 신흥대학으로 인가받았다.

 

 

 

신흥대학이 6·25전쟁으로 경영난에 처하게 되자 1951년 조영식이 학교를 인수하였다.

해방 후 한때 북한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조영식은 1955년 그의 저서에 반국가적 내용이 있다는 혐의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사장 조영식은 1960년 학교 이름을 경희대학교로 바꿨고, 경희대학교는 신흥무관학교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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