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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과 봉오동 전투

by 일신우일신 도생 2017. 3. 25.

항일 의병장 출신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여천(汝千) 홍범도 장군과 봉오동 전투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1868~1943)은 19세기 말 일제에 항거하며 분연히 일어선 항일 의병장 출신으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약 50년 동안 무장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다. 평민 출신의 의병장 여천 홍범도 장군은 대한의 백성에게는 항일투사로 추앙받았으며, 일본 제국주의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무서운 존재였다.

 

 

 

평양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10대 중반에 평양 감영에 입대했다가 부정부패가 판치는 군대의 부조리를 보고 병영을 탈출한다. 머슴과 사냥꾼, 노동자로 떠돌던 홍범도 장군은 금강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 한동안 지냈다.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수많은 우리 동포를 무참하게 학살하고, 1895년에는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을미사변, 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를 잔인하게 시해했다. 일제의 만행에 분개하며 조선 팔도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여천 홍범도 장군도 이때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여러 전투를 벌이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함경도 북청에서 한동안 농사와 포수로 지내던 홍범도 장군은 일제가 강압으로 을사늑약과 고종황제 강제 퇴위, 군대해산과 함께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만들자 포수들을 중심으로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된 군인들로 구성된 의병부대를 만들어 일제와 무장투쟁을 한다.

 

 

 

홍범도 장군과 의병부대는 일본군 헌병대와 전투를 벌이고, 일제가 운영하던 관공서와 금광, 친일파를 습격하는 등 전과를 올리며 일제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일제의 대대적인 반격에 무장투쟁의 근거지를 만주로 옮겼고,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전과를 거둔다. 

 

 

 

 

 

 

 

 

 

 

 

 

 

 

홍범도 장군의 의병부대에 피해를 본 일제가 다시 대대적으로 공세를 취하자 중과부적으로 말미암아 전력에 큰 타격을 입는다. 결국,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로 잠시 갔다가 이상설, 유인석, 이남기, 이범윤 등이 항일무장투쟁 조직의 작전과 명령 지휘체계를 단일화하기 위한 '대한13도의군' 조직을 결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동참한다.

 

 

 

'대한13도의군'의 간부를 중심으로 항일결사조직 '성명회'를 결성하고, 대한의 자주독립과 동포의 권익을 위한 '권업회'를 결성 등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1919년 3·1만세 운동을 전후하여 국내와 상하이, 연해주 등에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된다.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에서 활동했다. 대한국민의회 자체 군사조직 국민회국과 별도로 간도로 옮겨온 홍범도 장군은 대한회군 부대를 중심으로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고 총사령관이 되어 부대를 지휘한다.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부대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삼형제가 창설한 군무도독부 부대와 연합하여 국내로 진공 한다.

대한독립군과 군무도독부 부대는 혜산진, 강계, 만포진, 자성군 등에 있던 일본군을 급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봉오동 전투를 지휘한 사람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이지만, 대한독립군만 활약한 것이 아니다.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삼형제가 주도하여 창설한 '군무도독부' 부대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이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일제의 월강 추격대대를 섬멸한 것이 봉오동 전투다.

 

 

봉오동 전투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국민회군 등 부대가 통합하여 무장독립군 연합체 700여 명의 '대한북로독군부'가 이룬 승리다. 대한북로독군부 부대는 전사 4명, 중상 2명만 나왔다고 하며, 일본군 측은 사망 157명에 중경상자가 3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범도 장군이 지휘한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과 일본군 간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봉오동 전투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가 올라가 모두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고, 나라를 빼앗기고 울분을 삼키던 동포들에게도 무장투쟁으로 자주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게 된다.

 

봉오동 전투 승리는 다른 지역에 있던 독립군 부대의 무장투쟁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많은 사람이 독립군에 들어오게 되는 계기가 된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은 청산리 전투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러시아 자유시로 후퇴한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부대는 대한의용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독립군 부대 지휘부의 내분과 부대 간 분쟁이 일어나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원을 받은 고려혁명군(군정의회)으로 옮긴다.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 간에 무장 충돌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공산당의 통제가 강화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홍범도 장군의 무장투쟁은 막을 내린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은 무장투쟁 대신에 집단농장(콜호스)에서 한인 동포의 권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이어 나간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말미암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정미소 노동자, 극장 수위로 일하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여천 홍범도 장군은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를 머나먼 타국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서거했다.

 

 

 

 

 

 

 

 

 

 

 

 

 

 

항일무장투쟁사에서 큰 승리로 꼽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여천 홍범도 장군이다. 평민의 아들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평생을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항일무장투쟁을 한 여천 홍범도 장군은 의병활동을 하던 당시 부인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옥사하고, 두 아들은 전투에서 전사했다.

 

 

 

1911년 한韓민족의 정통 사서 『삼성기 상』, 『삼성기 하』,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이상 다섯 권의 책을 해학 이기가 감수하고, 운초 계연수 옮겨 적고 합본하여 『환단고기』라 정명하고 초간본 30권을 발간한다.

이때 여천 홍범도 장군도 『환단고기』 발간에 자금을 지원하며 참여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평생을 항일 무장투쟁헌신하고, 가족과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아직도 머나먼 이국땅 카자흐스탄에 외롭게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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