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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과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by 일신우일신 도생 2017. 4. 1.

무장독립투쟁단체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義烈團)을 창립한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과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약 3개월간 한반도 전역에서 비폭력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비폭력 3.1만세 운동을 일제는 총칼을 앞세워 무력으로 진압했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1919년 3.1운동 직후 출범한 국내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된다.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무력을 앞세운 일제에 대항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3.1만세 운동과 같은 비폭력 독립운동이 아니라 강력한 무장독립투쟁단체가 필요하다고 뜻을 모았다.

 

 

 

 

약산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초기에 무장독립투쟁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성에서 약산 김원봉, 황상규, 권준 등을 비롯한 13명의 애국지사가 모여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義烈團)의 창립했다.

 

의열단 단원은 최초 13명이었으며, 신흥무관학교 출신과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과 동향인 경남 밀양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여 경제 수탈과 백성을 핍박하고 학살한 일본 제국주의 수뇌부와 친일파를 암살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주요 기관 등을 파괴하는 공작이 주 임무다.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는 최대 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의열단(義烈단) 단원들은 맹세와 같은 행동목표 공약 10조(公約十條) 아래, 반드시 파괴해야 할 관공서와 주요기관 등 5파괴(五破壞)와 반드시 척살해야 할 대상자 조선총독부 고관, 일본군 수뇌부, 친일파 등 7가살(七可殺)의 행동지침을 갖고 활동했다.

 

1923년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은 북경에 있던 단재 신채호를 찾아와 의열단 선언문을 써 달라고 부탁한다.

단재 신채호는 의열단의 정신과 무장투쟁 실천 강령 등을 담아 6천여 자에 달하는 조선혁명선언문(의열단 선언문)을 작성했다.

 

 

 

 

 

 

 

 

 

 

 

1920년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와 경남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1922년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암살미수사건,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동경 니주바시 폭탄투척 의거,

1924년 친일파 정검주 척살 의거, 친일파 배정자, 이용구 암살미수사건,

1926년 동양척식회사,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 수십 차례에 걸쳐 파괴와 암살 등 무장투쟁활동을 하였다.

 

 

 

약산 김원봉은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의 단장으로 의열단원들과 수많은 거사를 모의했다.

그러나 의열단의 활동이 계속될수록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거세지고, 독립운동 자금 조달 문제와 의열단 내의 밀정 때문에 거사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잇따른 작전 실패가 이어지면서 의열단 단원들의 희생만 늘어가자 1929년 의열단을 해체한다.

 

의열단 단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군무부장(現 국방부장관)직을 역임한 약산 김원봉은 일제가 백범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을 더 많이 내건 인물로도 유명하다.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을 창립한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약산 김원봉이 학업을 시작할 때부터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동화중학교에 다녔으나 일제가 동화중학교를 폐쇄하였다.

서울로 올라간 약산 김원봉은 1916년 서울 중앙학교를 졸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다.

 

약산 김원봉의 고모부 황상규는 1913년 무장독립투쟁단체 대한광복회의 창립에 참여했으며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준 인물로 황상규는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 창립 후 고문이 된다.

 

 

 

김원봉은 중국 천진에서 독일인이 운영하는 덕화학당과 남경의 금릉 대학을 다녔으며, 신흥무관학교에서도 몇 달간 군사지식을 배운다. 고모부 황상규를 고문으로 하여 13명의 동지와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을 창립하고 의열단 단장이 됐다.

 

 

1926년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20여 명이 항일무장투쟁군대 양성을 목표로 중국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 사관학교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한동안 강력한 무력투쟁으로 일제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 공포의 대상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은 1929년 공식적으로 해체한다. 

 

 

 

 

 

 

 

 

 

 

약산 김원봉은 1932년 조선혁명간부학교, 1935년 민족혁명당, 1938년 장개석의 지원으로 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고,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 출신이 주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 창설된다.

약산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을 거쳐 임시정부 군무부장(現 국방부장관)이 된다.

 

 

해방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던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당시 고향 밀양에 돌아온 약산 김원봉을 환영하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해방 후 미 군정의 통치를 받은 남한은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손을 잡았던 약산 김원봉은 1946년 29개 좌파계열 단체가 연합한 민주주의 민족전선 공동의장이 된다.

 

 

 

 

 

 

 

 

 

 

1946년 미 군정이 쌀값을 통제하자 쌀가격이 폭등하면서 일어난 이른바 '대구 총파업 사건'의 배후 약산 김원봉을 지목한다.

'대구 총파업 사건'은 미 군정의 잘못으로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이 노동자(김용태)를 살해하자 벌어진 시민항쟁 성격의 시위였다. 그런데 미 군정은 이 사건을 좌익세력이 주도한 폭동으로 조작했다.

 

소위 '대구 총파업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약산 김원봉은 1947년 일제강점기 악질 친일파 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구타와 고문을 받는 수모까지 당하고, 우익깡패까지 약산 김원봉을 테러하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1948년 4월 의열단 단장 출신의 약산 김원봉은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에 갔다가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내각 국가검열상, 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략하면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른바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약산 김원봉의 4형제와 친척들 상당수가 총살당한다.

북한에 있던 약산 김원봉은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면서 자살 또는 학살당했다는 후문(後聞)이 전할 뿐이다.

 

 

 

의열단 단장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現 국방부장관),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낸 약산 김원봉은 남북연석회에 참석하려고 북한에 갔다가 눌러앉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70년 동안 대한민국과 북한의 위정자들은 김원봉의 북한 체류와 사상문제를 각기 자신들이 설정한 이념적 잣대로 평가하였다.

일제강점기 약산 김원봉의 독립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과 항일투쟁, 순수한 열정마저도 버림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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