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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잔학한 만행 간도참변(경신참변, 간도대학살)

by 도생(道生) 2017. 4. 2.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 패배한 일제가 간도의 조선인을 무차별 보복 학살한 만행 간도참변

일제의 잔학한 만행 간도 대학살(경신참변)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하여 안무 장군의 국민회군,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형제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뒀다.

독립군에 패한 일제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1920년 8월 일본군은 먼저 중국 영토였던 만주에 들어갈 명분을 만들기 위해 중국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성을 공격해 중국인과 조선인 등을 죽이고,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였다.

훈춘사건을 조작한 일본군은 수만 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1920년 10월에는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군무도독부와 서일과 김좌진 장군의 북로정서군이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대대적인 복수에 나서면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다.

 

 

 

만주 지역에는 일제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이주해 온 민간인과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독립군이 있었다.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과 동포들이 1920(경신庚申)년 10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잔학한 일제의 총칼 아래 무참하게 학살당한 사건을 경신참변, 간도 대학살, 간도참변 등이라 한다.

 

 

 

 

간도 대학살(간도참변)을 자행한 일본군 부대는 홍범도, 안무, 최진도 3형제가 연합한 부대에 패한 일본군 19사단 보병 75연대가 앞장섰다.

 

간도참변, 경신참변, 간도 대학살로 불리는 일제의 잔학한 만행은 독립군 토벌과 독립군의 활동 기반이 되는 조선인 사회를 파괴하고 양민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강력하게 탄압한다. 

 

 

 

 

 

 

 

 

 

 

 

 

 

 

일제의 잔학한 만행 간도참변(간도 대학살)은 3~4개월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도 소규모 부대가 남아서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이 무참하게 학살한 사람은 독립군이 아니었다. 간도에 이주하여 살던 선량한 백성, 즉 양민이었다.

 

일제가 저지른 잔학한 만행 간도참변(간도 대학살)에서 무참하게 학살된 사망자만 근 4천 명에 이르고, 확인되지 않은 사망자까지 포함하여 3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는 학교와 교회, 일반 가정집에 이르기까지 방화와 파괴, 약탈을 일삼으며 조선인 사회를 초토화했다.

일본군은 민간인을 작두와 일본도로 참수하고, 생매장시키고, 총으로 쏘아 죽이고, 사지를 잘라 죽이고, 얼굴과 피부 가죽을 벗기고, 여성을 겁탈하고, 양민 수십 명을 묶어서 교회당에 몰아넣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불길 속에서 뛰쳐나온 양민을 대검으로 찔러 죽이는 잔학한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간도 대학살 만행을 저지르면서 살아남은 양민에게 참수현장을 직접 목격시켜 두려움에 떨게 하여 독립군을 지원하거나 독립운동을 할 의지를 꺾어 버렸다.

 

 

 

 

 

 

 

 

 

 

 

 

 

 

양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간도참변(간도 대학살)의 일제의 잔학한 만행이 지속하면서 살아남은 조선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활동 근거지를 잃은 독립군부대는 새로운 활동기지를 찾아 나선다.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새롭게 안착한 곳은 소련의 연해주(자유시) 지역이다.

그러나 소련에 정착한 독립군 부대는 소련의 내전과 독립군의 내분으로 와해하고, 스탈린에 의해 우리 동포 30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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