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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간토 지역 관동대지진(동경대지진)과 조선인대학살

by 도생(道生) 2017. 4. 9.

일본 간토 지역이 초토화된 관동대지진(동경대지진)과 일제의 만행 조선인 대학살 사건(관동대학살)

 

 

 

 

 

 

 

 

 

 

 

 

 

 

근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 대학살을 시작한 것은 1894년 동학농민 혁명 때였다.

동학농민 혁명 때는 조선 군인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30만 명의 동학 혁명군 대다수가 일제의 총칼 아래 희생됐다.

 

1937년 일제가 20만~30만 명에 이르는 중국인을 학살한 난징대학살의 만행을 자행했는데, 조선은 그보다 40년 전에 이미 30만 명 이상이 대학살을 당했다. 

 

 

 

일제는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면서 수십 명, 조선의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항거한 조선인을 무참하게 학살하였고, 3.1만세 운동과 간도대학살(경신참변) 등에서도 조선인을 대학살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간토) 지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 대학살의 만행을 또다시 저지른다.

 

 

 

 

 

 

 

 

 

 

 

 

 

판구조론으로 볼 때 일본은 환태평양지진대에 놓여 있다.

1923년 9월 1일 일본의 관동대지진(간토 동경대지진)이 발생할 때만 해도 일본이 이른바 '불의 고리'라고 불리는 환태평양지진대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당시만 해도 섬나라 일본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이 지진과 화산활동이 빈번한 나라라는 사실만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동경과 요코하마 등 간토(관동) 지역에 발생한 지진이라 하여 관동(간토)대지진, 동경대지진이라고도 말한다.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간토 동경대지진)은 규모 최소 7.9에서 최대 8.3으로 추정하고 있다.

 

 

관동대지진(간토 동경대지진)의 사망자와 실종자는 정확한 통계치가 없고 추정 숫자만 있다.

대략 10만 명 내외의 사망자와 수천 명에서 수만 명 실종자, 또는 혹자는 수십만 명의 사망 실종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95년 발생한 고베대지진(한신대지진)은 규모 7.2로 현대식 내진설계를 한 건물과 도로가 무너져 버리고, 6천4백여 명이 사망했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은 내진설계가 전혀 안 된 무방비와 다름없는 상태로 피해를 봤기 때문에 단순히 숫자적인 피해를 넘어 상상 그 이상이었 짐작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관동대지진(동경 간토대지진)으로 도시는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건물과 다리는 무너지고 불길이 번지면서 도시는 총체적 혼란에 빠져들자 일제는 계엄령을 선포한다.

 

 

 

 

 

 

 

 

 

 

 

 

 

 

관동대지진(간토 동경대지진)으로 민심이 동요될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와 군부는 계략을 꾸민다.

조선인이 관동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폭탄 테러, 폭동, 방화, 강도, 강간, 식수에 독을 타는 등의 흉악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소문을 조직적으로 퍼트렸다. 일본 언론도 일본 정부와 군부가 조작한 거짓말을 보도했다.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일제가 날조한 유언비어는 삽시간에 일본 전역에 퍼져나갔고, 일본인에게 조선인은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이 된다.

 

 

 

일제는 조선인 대학살을 획책하면서 그동안 골칫거리로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일본인 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해 나갔다.

일본군과 일본 경찰, 그리고 죽창과 일본도, 쇠꼬챙이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自警團)조직되면서 조선인 대학살이 자행됐다.

 

 

 

 

 

 

 

 

 

 

 

 

 

 

간토(관동) 지역에는 조선인 유학생과 강제노역으로 끌려온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관동대학살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 중국인과 일본인도 조선인으로 의심되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비슷한 외모를 가진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가운데 조선인을 색출하려는 방법으로 의심이 가는 사람에게 '15엔(쥬고엔)'을 발음하도록 했다. '쥬'를 '주'나 '추' 등으로 잘못 발음하는 사람은 조선인으로 간주하여 학살했는데, 제대로 발음을 못 한 지방 출신 일본인과 중국인도 조선인으로 오해받아 학살당했다. 

 

 

 

관동대지진(동경대지진)으로 간토 지역이 초토화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충격과 혼란에 빠진 민심 동요를 막고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일제가 조직적으로 유언비어를 조작하고 유포했다.

 

 

 

 

 

 

 

 

 

 

 

 

 

조선인일본인 사회주의자와 일부 중국인 등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불태우고 암매장했음에도 일본 정부가 학살 사실을 부정하면서 정확한 희생자 통계가 없다. 강제노역으로 끌려와 있던 동포와 유학생 등 최소 6천여 명에서 수만 명이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대학살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의 민간조직 자경단에 의해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 숫자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조선인 대학살의 희생자를 조사하고 파악해야 할 일본 정부는 조선인 대학살로 희생된 숫자를 철저히 숨겼고, 그나마 발표한 조선인 학살 사망자 숫자가 2백여 명이라고 했다. 

 

일제는 1923년 9월 1일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간토 지역이 초토화된 관동대지진(동경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해서 해마다 지진대비 훈련을 하고 있다. 조선인 대학살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과 경찰, 자경단은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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