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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 의거

by 도생(道生) 2017. 4. 23.

대한남아의 충의로운 기상을 세계만방에 알린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홍커우)공원 폭탄투척 의거

 

 

 

 

 

 

 

 

 

 

 

 

 

 

 

1932년 4월 29일 정오가 가까운 시간 중국 상해(상하이)의 홍구(홍커우)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 의거는 중국과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렸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대한제국의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던 1908년 6월 21일 충청도 예산군 덕산면 시령리에서 대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태어났다.

윤봉길 의사는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윤봉길 의사는 11살이 되던 1918년 예산군 읍내리 덕산공립보통학교(1912년 개교, 現 덕산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919년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학교를 그만두고 동생 윤성의와 함께 한학을 배웠다.

1921년 오치서숙(烏峙書塾) 서당에서 삼서삼경 등 유학의 고전 공부에 집중하며 신문과 「개벽」 지 등을 통해 세상 소식과 신학문을 접했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공동묘지에 묻힌 아버지 무덤을 못 찾자 공동묘지 묘표를 무더기로 뽑아와 결국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된 일을 계기로 1926년 농촌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시집 『오추』, 『옥수』, 『임추』 등을 발간하고, 『농민독본』 3권을 직접 저술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1928년부터 부흥야학원, 월진회, 위친계, 수암체육회 등을 조직하여 야학과 독서회 운동, 농민계몽과 농촌부흥운동으로 농촌의 자활과 독립을 위한 민족정신을 배양해 나갔다.

 

 

 

일제의 계속되는 수탈과 탄압에 농촌은 더 피폐해져 갔다.

학예회의 '토끼와 여우' 연극 공연이 일제의 심기를 건들면서 조사를 받고 감시대상이 된다.

 

1930년 3월 6일 농촌계몽운동의 한계를 느낀 매헌 윤봉길 의사는 잔악한 일제의 강압 통치를 징벌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더 큰 뜻을 품고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매헌 윤봉길 의사가 집을 떠날 때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을 써놓았다.

'대장부가 큰 뜻을 품고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담대하고 비장한 의지를 표현한 윤봉길 의사의 글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대한남아의 뜨거운 열망과 기개가 담겨 있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중국으로 망명하던 도중 일제에 의해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당하고 45일 동안 옥고를 치른다.

 

 

 

만주로 넘어온 매헌 윤봉길 의사는 김태식, 한일진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홀로 대련을 거쳐 청도로 들어간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31년까지 약 1년간 중국 청도의 세탁소에서 지내면서 망명길에 여비를 보태준 월진회원들에게 돈을 보내주고 상해로 들어갈 여비를 마련했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31년 5월경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로 들어가 안공근의 집에 머문다.

안공근은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다.

 

 

 

 

 

 

 

 

 

 

 

 

1931년 7월 일제의 치밀한 계략과 선동으로 중국인과 조선인이 충돌하는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면서 한·중간에 갈등이 생겼고, 일제는 1931년 9월 19일 만주사변, 1932년 1월 18일에는 상해사변을 일으키며 기세를 부리고 있던 때였다.

 

 

백범 김구는 1931년 10월 암살과 파괴 등의 목표로 비밀결사조직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의사가 1932년 일본 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다.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는 상해 전투를 자축하기 위해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 왕의 생일 천장절 행사를 한다는 신문 기사를 본다. 행사장 질서유지를 위해 매점을 설치하지 않으니 도시락과 물통을 휴대할 수 있다는 보도였다.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판단한 백범 김구는 매헌 윤봉길을 만나 상해 홍구공원 천장절 행사 거사를 제안했고, 매헌 윤봉길은 기꺼이 하겠다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채소 장사를 하던 매헌 윤봉길 의사는 거사 성공을 위해 상해 홍구공원을 주변을 사전답사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한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7일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봉근의 집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가슴에는 입단 선언문, 왼손에는 수류탄과 오른손에는 권총을 든 사진을 찍는다.

 

 

 

1932년 4월 29일 새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와 매헌 윤봉길은 김해산의 집에서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함께한다.

 

매헌 윤봉길은 이 자리에서 주머니에 있던 회중시계를 꺼내 잠시 후면 아무 필요가 없어질 자신의 6원짜리 새 시계와 백범 김구의 1원짜리 고물 시계를 바꾼다. 상해 홍구공원에 가기 위해 차에 올라탄 매헌 윤봉길은 차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도 백범 김구에게 모두 주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는 일본 왕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장 단상에 일본 수뇌부가 늘어서 있었다.

 

일제의 수뇌부를 척살하기 위해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 두 가지 폭탄을 준비해 간 매헌 윤봉길 의사는 기미가요를 부르던 행사장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한다. 엄숙한 분위기의 상해 홍구공원 천장절 행사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매헌 윤봉길 의사의 천장절 행사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 의거로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육군 대장은 큰 상처를 입어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일본 거류민단장 카와바다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일본 해군 제3함대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 실명 및 전신 부상,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은 왼쪽 다리 절단, 주중 공사 시게미쓰는 오른쪽 다리 절단,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와 거류민단 도모노 서기장 중상 등 10여 명이 죽거나 중경상을 입었다.

 

상해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배후를 밝히려는 헌병대의 취조와 혹독한 고문에도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다.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 의거로 일본군과 민단의 수뇌부를 척살한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32년 5월 25일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상해 일본군 헌병대에 구금되어 있던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1월 18일 일본 우편수송선 대양환호를 타고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로 옮겨졌다.

 

 

일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갇혀있던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2월 18일 극비리에 가나자와 육군형무소로 옮겨진다.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 미고우시 육군 공병장 서북쪽 골짜기에서 26발의 탄환을 온몸에 맞은 25살의 윤봉길 의사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원수의 땅에서 순국했다.

 

잔학한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공동묘지 관리사무소와 소각장 사이의 길에 묻고 14년간 짓밟고 다녔다.

 

 

 

 

 

 

 

 

 

 

 

 

 

1946년 백범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순국한 이봉창, 윤봉길, 박정기 의사의 유해 발굴을 요청했다.

일본군 간수였던 시게하라가 1946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의 매장지를 알려주면서 유해가 발굴됐다.

 

 

백정기, 이봉창 의사의 유해도 어렵게 발굴되어 1946년 5월 15일 세 분의 유해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조국으로 봉환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는 7월 6일 엄숙한 분위기 속에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모셔졌다.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의거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던 당시 주중 공사 시게마쓰 마모루는 1945년 9월 2일 일본을 대표한 외무대신으로 미주리호 함상에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뚝이며 나타나 맥아더 장군 앞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홍구공원 폭탄투척 의거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4억 국민과 백만 대군이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하며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 의거는 1919년 3.1만세 운동 이후 정체된 독립운동을 전환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이후 항일무장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우리 청년 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 굳세고 강직한)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 비와 이슬)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고, 이 길을 택하였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맹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에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나는 적성(赤誠 빨간 정성, 마음에서 우러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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