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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 장례식(인산일)날 일어난 6.10 만세운동

by 일신우일신 도생 2017. 4. 29.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황제 장례식(인산일因山日)날 일어난 1926년 6·10 만세운동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가 무력으로 강제병합하면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일제는 대한제국 2대 순종황제를 이왕(李王)으로 격하하였고, 창덕궁에 유폐된 순종은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세월을 보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종황제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고종황제 장례식날인 인산일(因山日, 1919년 3월 3일) 직전에 대한독립을 위한 비폭력 3.1 만세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났었다. 

 

고종황제가 승하하고 7년이 지난 1926년 4월 26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황제도 5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승하한다.

나라를 빼앗긴 대한의 백성들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모두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순종황제가 승하하고 이틀이 지난 1926년 4월 28일 송학선이 창덕궁 앞에서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도 있었기 때문에 혹시 모를 일이 발생할까 하여 철통같은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1919년 당시 고종의 장례식(인산因山) 바로 전에 3·1 만세운동을 겪은 터라 순종의 장례식날 조선총독부는 인천항과 부산항에 각기 함대를 정박시켜 놓고, 일본군과 경찰 등의 병력 7천여 명을 서울에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등 삼엄한 감시와 통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순종황제 장례식날(인산일)에 일어난 6·10 만세운동은 만세운동에 다수의 학생이 참여해 체포됐다고 해서 학생 항일만세운동이라고 볼 수는 없다. 

 

6·10 만세운동은 천도교,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노동계), 대학생과 중등학생, 병인의용대 등이 다양한 계층이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고 연합하여 일제에 항거한 범민족연합체의 만세운동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6·10 만세운동은 독립, 민족, 자유, 교육, 노동, 농민 등 다양한 구호와 이와 관련된 격문(檄文)이 나왔다.

 

 

 

 

 

 

 

 

 

 

 

 

 

 

조선공산당은 5월 1일 노동자의 날에 대규모 항일 투쟁을 준비하였는데 순종황제가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사람이 많이 모일 것 같은 장례식날(인산일)로 거사 일로 바꿔 준비하다가 지도부가 일제에 사전 검거됐지만, 6·10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 연희전문과 경성대학,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등 수만 명의 학생, 노동자, 종교인, 지식인, 일반 백성 등 다양한 계층이 동참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대여(大與)가 가는 길, 창덕궁 돈화문부터 남양주 유릉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잃고 망국의 설움에 잠겨 있던 수많은 백성이 마지막 황제가 떠나는 길을 배웅하고 있었다.

 

 

 

 

 

 

 

 

 

 

 

 

 

 

1926년 순종황제 장례식(인산일因山日)에 일어난 6·10 만세운동은 크게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 그리고 학생계열이 연합한 항일만세운동이다. 조선공산당의 머리가 되고 천도교는 몸이 되고, 학생은 팔과 다리가 되어 6·10 만세운동을 펼쳤다.

 

7천여 명에 이르는 일본군과 경찰의 강력한 진압에 1천여 명의 학생이 서울과 지방에서 체포되면서 6·10 만세운동은 저지당한다.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10여 명은 재판을 징역형을 선고받아 투옥되었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국장(國葬, 인산因山)을 계기로 1919년 3·1 만세운동과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6·10 만세운동이 1919년 3·1 만세운동처럼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는 항일만세운동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지만, 서울의 6·10 만세운동이 알려지면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부와 평양의 여러 학교가 동맹 휴학을 하고 일제에 항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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