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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일제강점기 최대 학생항일운동 광주학생운동

by 일신우일신 도생 2017. 4. 30.

1919년 3·1만세 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최대 학생 항일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후 억압과 핍박, 착취와 차별, 수탈 등을 일삼으며 식민통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는 친일파를 비롯하여 조선의 모든 백성은 일제가 탐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1926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의 장례식, 인산일(因山日) 서울에서는 대규모의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학생(現 고등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7천여 명의 일본군과 경찰의 대대적인 진압과 체포로 전국적으로 퍼지지는 못했다. 6·10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지는 못했지만, 비밀결사와 동맹휴학 등의 학생 항일운동의 성과는 만들었다.

 

 

 

 

일제 식민통치 방식이 1910년대에는 무단통치시대였으며, 1920년대는 소위 문화통치시대였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시대와 명칭만 바뀌었을 뿐 일제의 우리 민족 탄압과 차별은 계속되고 있었다.

 

 

1926년 11월 광주 지역 여러 고등학교에 조선의 독립을 위한 학생 항일운동 조직 성진회가 조직되었다.

성진회 소속의 학생들은 1927년 2월 광주사범학교, 5월 광주 고등보통학교에서 일본학생과 차별에 항의하여 시위와 동맹휴교운동을 벌였다.

 

 

 

 

 

 

 

 

 

 

 

 

1928년 4월 전라도 광주 인근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이경채가 조선독립선언문을 만들어 돌리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지자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비밀결사조직 성진회 소속 학생들을 중심으로 휴교운동을 벌인다.

 

1929년 3월 광주고등보통학교 조선인 학생 퇴학당하고, 6월 일본 학생이 조선 학생을 비하하면서 충돌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1929년 10월 30일 일제강점기 최대 학생 항일운동인 광주학생운동이 촉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3·1만세 운동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한 최대의 항일학생운동 광주학생운동은 차별과 무시에서 비롯됐다.

 

광주에서 출발하여 나주역에 도착한 열차 안에서 일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이 머리를 잡고 모욕을 주면서 희롱하였다. 이때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박기옥의 4촌 동생 박준채도 같이 하교하는 중이었다.

 

 

일본 학생들이 4촌 누나를 멸시하고 희롱하는 모습을 본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 광주중학교 학생들 간에 충돌이 발생했고, 출동한 일본 경찰은 일본 학생 편을 든다.

 

 

 

 

 

 

 

 

 

 

 

 

 

 

11월 1일 광주역에서 한·일 학생 간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자 학교 교사들이 말리면서 양측의 충돌이 더는 커지지 않았다.

11월 3일 조선인 학생들은 명치(메이지)유신을 기념하는 명치절 행사에 기미가요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다녀오던 일본 중학교들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간에 폭력사태가 벌어지면서 일본인과 경찰도 폭력사태에 개입하게 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해산한다. 

 

 

한·일 학생 간의 충돌은 처음에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시작됐으나, 일제의 식민통치 20년 동안 우리 민족을 무시하고 억압과 차별, 수탈과 착취를 당했던 울분이 폭발하면서 전국적인 학생 중심의 항일투쟁으로 확산한다.

 

 

 

 

 

 

 

 

 

 

11월 12일 광주 지역의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과 신간회 등 항일투쟁을 하던 여러 단체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외지에서 참가한 사람까지 합세하여 대규모 2차 거리 시위를 벌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 학생 항일운동으로 1차 시위 때와 달리 2차 시위 때는 1천 명이 넘는 광주 지역 중고등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 등의 구호를 외치고 격문을 뿌리는 과정에서 수백 명이 일경에 체포되지만,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광주지역 학생들은 다음 해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한다.

 

 

 

 

 

 

 

 

 

 

 

 

여러 단체와 일반인의 적극적인 지지와 호응과 참여가 뒷받침된 광주학생운동은 3·1 만세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최대 학생 항일운동이 되어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 퍼진다.

 

 

 

1930년 3월까지 전국의 300곳이 넘는 학교가 동맹휴교에 동참하였고, 수만 명에 이르는 학생이 항일 시위에 참여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 학생 항일운동이며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투쟁으로 2천여 명의 학생이 정학, 5백여 명의 학생이 퇴학 조치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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