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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의사 일본왕(일본천황) 암살기도 의거

by 도생(道生) 2017. 5. 5.

항일비밀결사대 한인애국단원 이봉창 의사

일본 왕(히로히토 일본 천황) 암살 기도 폭탄투척 의거

 

 

 

 

 

 

 

 

 

 

 

 

 

 

 

메이지(명치)유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본 왕은 허수아비 왕이었으며, 무신정권(막부정권)의 수장 쇼군(將軍) 나라를 다스렸다.

1868년 지방의 무사들을 중심으로 막부정권을 무너트리면서 천황중심제(일본 왕 중심의 왕정복고) 국가로 탈바꿈한다.

 

 

메이지(명치)유신으로 왕정복고를 이룬 일본 왕 무쓰히토(메이지천황, 1867~1912)는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강제병합했다.

일본 왕 요시히토(다이쇼 천황, 1912~1926)를 거쳐 히로히토 일본 왕(쇼와 천황, 1926~1989)이 일본 제국주의를 다스렸다.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 의사가 암살 기도한 일본 왕이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를 중심으로 1931년 항일비밀결사대 한인애국단이 조직됐다.

이봉창 의사는 한인애국단 1호 단원이다.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왕(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암살 기도하였던 이봉창 의사는 결혼하지 않아 직계 후손이 없다.

 

현재 이봉창 의사에 대한 기록은 백범 김구 선생의 『도왜실기』, 『백범 일지』 등과 일본 경찰의 심문 내용과 자술서 등을 종합한 기록이다.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이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기록한 『도왜실기』 등과 이봉창 의사의 신문과정에서 작성된 여러 조서가 일부 엇갈리는 부분도 있다.

 

 

 

이봉창 의사는 1900년(또는 1901년) 8월 10일 지금의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글을 배우다 11세에 문창보통소학교에 입학하고 가세가 기울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다.

 

 

당장 먹고살기에 바빴던 청년 이봉창은 과자점 점원, 약국 점원 등의 직업을 거쳐 만선 철도에서 일하며 전철수와 연결수로 근무하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수모를 당하고 부당한 대우까지 받게 되자 일을 그만둔다.

한동안 금정청년회에서 간사를 지내다가 1926년 조카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봉창은 오사카 철공소에서 일하던 중 일본인 양자로 들어가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로 이름을 바꾼다.

오사카, 나고야, 요코하마, 아마가자키 등지에서 가스회사와 부두노동자, 잡역부 등의 직업을 전전하다가 일왕(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즉위 소식을 듣는다.

 

 

1926년 일왕 명치(메이지 천황)의 아들 요시히토 일본 왕(다이쇼 일본 천황)이 죽고, 새로운 일본 왕이 된 히로히토 일본 천황은 1928년 도쿄에서 공식적인 즉위식을 했다.

 

이봉창은 친구들과 히로히토 일왕의 즉위식을 보러 갔다가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렸는데 품 안에서 한문이 섞인 한글 편지가 발견되어 9일간 유치장에 갇혔다가 풀려난다. 일본 경찰의 이봉창 체포는 단지 조선인이기 때문이었다.

 

 

 

이봉창은 조선인은 영원히 조선인으로 살 수밖에 없고, 절대 일본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무시와 차별, 분노와 울분에 치를 떤다. 이 사건은 단지 먹고 살기 바빴던 평범한 일제의 식민지 청년 이봉창을 히로히토 일본 왕(다이쇼 일본 천황) 암살 기도 폭탄투척 의거를 한 독립투사로 이봉창 의사든 계기가 된다. 

 

 

 

 

 

 

 

 

 

 

 

 

유치장에서 나온 이봉창은 오사카, 도쿄 등지에서 일하다가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간다.

1931년 1월 상해 명화철공소에서 일하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협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들과 접촉한다.

 

일본의 게타(나막신) 신발을 신고 절반은 일본어, 절반은 한국어를 하는 이봉창을 임시정부 사람들은 '일본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1931년 3월 이봉창은 드디어 백범 김구 선생과 마주하며 히로히토 일본 왕(다이쇼 일본 천황) 암살 계획을 세운다.

1931년 12월 12일 이봉창 의사는 안공근의 집에서 한인애국단 1호 단원으로 가입하고, 13일 태극기를 배경으로 가슴에는 선서문, 양손에는 수류탄을 들고 일본 왕(일본 천황) 암살 기도 폭탄투척 의거를 준비하며 기념촬영을 한다.

 

 

약 4개월 후인 1932년 4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집에서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 의거를 성공한 윤봉길 의사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1931년 12월 17일 중국 상해에서 출발하여 12월 말경 일본 오사카에 도착한다.

 

1932년 1월 8일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신년 육군 관병식(觀兵式, 군대 사열 의식)을 마치고 일본 왕(일본 천황)이 사는 사쿠라다몬으로 돌아가는 길목의 경시청 앞에서 군중 속에 숨어 있던 이봉창 의사는 히로히토 일본 왕(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이봉창 의사는 궁내부대신이 탄 마차를 히로히토 일본왕(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탄 마차로 오인하여 폭탄을 투척한다.

일본왕은 무사했고, 말과 일왕을 수행 중이던 사람만 다친다.

 

 

 

한인애국단원 1호로 민족의 원흉 일본 왕(히로히토 일본 천황) 암살 기도 폭탄투척 의거를 시행한 이봉창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된다. 1932년 9월 16일 일본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10월 10일 교수형이 집행되어 향년 32세로 순국했다.

 

 

 

 

 

 

 

 

 

 

 

 

일왕 암살 기도 폭탄투척 의거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인에게 살아 있는 신(神)과 같은 존재였던 일본 왕(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이 일본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육군 관병식 직후였으며, 일본 왕이 거처하는 왕실 인근의 경시청 부근에서 벌어진 이봉창 의사의 일왕 암살 기도 폭탄투척 의거로 일본 열도가 경악과 충격에 빠졌다. 이봉창 의사의 일본 왕 암살 기도 의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고, 일본 내각은 총사퇴하고 경시청장을 비롯한 일본 왕(일본 천황) 경비 관련자들이 대거 파면된다.

 

 

 

 

 

 

 

 

 

 

 

 

만천하에 대한의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한 이봉창 의사의 일본 왕 암살 기도 폭탄투척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장독립투쟁에 불씨를 살렸다. 

 

 

일본 땅에 묻혀있던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세 분의 유해가 백범 김구 선생의 요청으로 발굴되어 1946년 5월 15일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고, 7월 6일 국민장을 치르고 효창공원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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