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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항일무장독립전쟁 한중 연합작전 대전자령전투

by 도생(道生) 2017. 5. 7.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항일무장독립전쟁

·중 연합작전으로 거둔 대승리 대전자령전투 

 

 

 

 

 

 

 

 

 

 

 

 

 

 

한국독립군은 193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독립당의 무장투쟁독립군으로 편성된 부대다.

지청천 장군은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만주 지역에서 일제와 항일무장독립전쟁을 치른다.

 

 

일본 제국주의는 1931년 9월 만주 철도 폭파 사건을 조작하여 이른바 만주사변, 1932년 1월에는 만주로 쏠린 이목을 돌리고, 상해에 영향력 확대를 위해 중국인을 돈으로 매수해 일본인을 폭행하게 사건을 조작하여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일제는 1932년 4월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 허수아비 집정으로 세우고 꼭두각시 나라 만주국을 건국한다.

 

 

 

 

 

 

 

 

 

 

 

 

로 폭파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병력을 증원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군과 한국독립군은 한·중 연합작전을 협의한다. 1932년 2월 일본군의 공격으로 한·중 연합군은 큰 피해를 보게 된다.

 

 

 

1932년 9월 지청천 장군의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벌여 쌍성보 전투에서 승리한다.

그러나 항공기를 동원하는 등 일본군과 만주군대대적인 보복공격으로 지청천 장군의 한국독립군 부대와 중국군큰 피해를 당하고 후퇴한다. 

 

한·중 연합작전으로 항일무장독립전쟁을 계속한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부대는 1932년 12월 경박호 전투, 1933년 4월 사도하자 전투, 6월 동경성 전투 승리 등에서 연속하여 대승을 거둔다.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두각시 나라 만주국을 새움으로써 만주 지역과 몽골 일부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자주독립을 위한 항일무장독립전쟁의 근거지가 사라지면서 대한의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과 만주군의 공격을 피해 계속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동경성 전투에서 승리한 한·중 연합군은 항일무장독립전쟁을 치를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1933년 6월 28일 노송령을 거쳐 이동한다. 당시 대전자(大甸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한·중 연합군이 공격하기 위해 노무제하(老毋諸河)로 이동한다.

 

 

한·중 연합군은 일본군이 이동한다는 첩보를 듣고 대전자령(大甸子嶺, 태평령太平嶺)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1933년 7월 3일(또는 6월의 어느날) 대전자령 골짜기 요지에 매복하고 있던 한·중 연합군은 일본군 병력 후미가 산 중턱에 도달하자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공격한다. 생각지도 못한 채 대전자령을 넘던 일본군은 한·중 연합군의 기습에 대부분이 사살된다.

 

 

 

 

 

 

 

 

 

 

 

 

 

대전자령전투는 한·중의 연합작전으로 4시간여의 치열한 격전 끝에 일본군을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대승을 거둔 한·중 연합군은 소총 1,500정, 대포와 박격포 10여 문 등과 군수물자 20 마차 분량의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한다.

 

 

한·중 연합군 모두 전투를 치를 군수물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예전부터 누적된 한·중 연합군의 갈등과 군수문자 배분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한·중 연합군은 깨지고 만다.

 

 

한·중 연합적전으로 대승을 거둔 대전자령전투는 일제강점기 항일무장독립전쟁사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와 함께 독립군 3대 대첩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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