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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근대문학의 선구자, 친일파 변절자 육당 최남선

by 도생(道生) 2017. 5. 20.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며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육당 최남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대표적 친일파 문인으로 수록된 반민족 변절자 육당 최남선

 

 

 

 

 

 

 

 

 

 

 

 

 

 

육당 최남선은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고 있다.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춘원 이광수(1892~1950), 벽초 홍명희(1888~1968?)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린 근대문학의 선구자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육당 최남선은 춘원 이광수와 일제강점기 활동했던 다수의 문인과 함께 친일파 변절자로 수록되어 있다.

 

 

혹자는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한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 변절자로 돌아선 육당 최남선의 친일행각이 다수를 위한 최남선의 자기희생으로 미화하기도 한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었지만, 제대로 활동도 하지 못하고 해산됐다.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등 전 분야에 걸쳐 친일파의 후손과 일제에 부역한 변절자의 후손과 직계 제자들이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최남선은 중인 신분으로 관상감에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엄청난 재산을 모은 최헌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에서 한문과 한글을 공부하면서 서양의 신학문을 접하고, 1902년 경성학당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웠다.

 

 

15세가 되던 1904년 대한제국 황실의 국비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동경부립 제일중학교에 다녔다.

1906년 와세다대학 지리 역사과에 재학 중 조선 유학생 동맹 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한다.

최남선은 2년 동안 일본에서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고 귀국한다.

 

 

 

 

 

 

 

 

 

 

 

 

귀국한 육당 최남선은 19살이 되던 1908년 현재의 화폐가치로 수백억 원에 달하는 돈을 아버지로부터 받아 근대적 기술로 인쇄와 출판을 하는 신문관(新文館)을 세우고, 춘원 이광수 등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한다.

 

육당 최남선이 『소년』에 '해(海)에게 소년에게'를 발표하면서 한국문학의 근대적 맹아(萌芽, 새싹)로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1909년 도산 안창호와 신민회를 중심으로 청년학우회를 설립하였고, 1910년 조선광문회를 창립하여 우리의 고전과 고서 등을 수집하여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의 고전과 『신 자전』, 『말모이』 등의 사전을 간행했다.

 

1912년 어린이 잡지 『붉은 저고리』를 시작으로 1913년 『새벽』, 『아이들보이』, 1914년 『청춘』 등을 간행하지만, 모두 강제폐간된다.

 

 

 

 

 

 

 

 

 

 

육당 최남선은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였다.

민족대표 33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민족대표 48인에 포함된 육당 최남선은 2년 8개월 복역하고 1921년 출소한다.

 

육당 최남선이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며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 변절자가 된 것이 출소하고 나서라고 한다.

 

 

1908년 설립된 신문관은 1922년 문을 닫고 동명사로 이름을 바꿔 친일적인 내용을 담은 주간지 『동명』을 발행한다. 

동명사를 만들때 조선 총독 사이코 마코토의 정치 참모로 경성일보 사장인 아베 미츠이에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도움을 받았다.

 

1924년 시대일보를 창간했지만, 1926년 중외일보에 판권을 넘기고, 1931년 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로 바뀌었다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말미암아 1937년 폐간된다.

 

 

 

 

 

 

 

 

민족주의적 역사관으로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했다는 육당 최남선의 「아시조선」과 「불함문화론」, 「단군론」은 1926년, 민족의 영산을 순례한 기행문 「백두산근참기」는 1927년에 쓰였다. 최남선의 쓴 글에는 단군신화로 나온다.

 

 

일제는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 정당화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조작하고 말살하기 위해 1916년 조선총독부 직할 기관으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었고, 1925년 조선사편수회로 확대 개편했다.

 

육당 최남선은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사편수회 촉탁을 거쳐 위원으로 활동한다.

내선일체와 일제가 만든 터무니없는 일선동조론을 주장하는 등 친일파 변절자답게 친일논설을 각종 신문에 기고한다.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고, 1939년에는 일제가 세운 괴뢰국 만주국의 건국대학 교수가 되고, 만주의 어용신문 만몽일보 고문이 된다.

 

 

1943년 일제가 벌인 태평양전쟁에 총알받이로 학도병에 자원하라고 매일신보에 기고하고, 시국 강연을 하고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학도병 권유 연사로 활동하며 조선의 젊은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 앞장선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처벌받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육당 최남선의 일생을 보면, 20세기 초부터 병들어 죽을 때까지 근대문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고,

1910년에서 1921년까지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독립운동가다운 모습을 보였으며,

1921년부터 1927년까지는 양다리를 걸치면서 친일파 변절자가 되어가는 과정이었고,

1928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까지는 친일파 변절자의 모습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1918년 최남선이 쓴 『계고차존』은 한민족의 상고 역사인 단군조선과 부여의 역사를 순수하게 다루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과 육당 최남선이 동방문화의 원류가 한민족이라고 썼다고 주장하는 1926년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은 우리의 역사도 다루었지만, 동방의 역사로 확대되었다. 

 

단군신화의 불함문화론은 일제가 주장하는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으로 변질된다.

결국, 조선과 일본은 하나이며, 일본 문화의 우월성으로 일제가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이 바뀐다.  

 

 

 

 

 

 

 

 

 

 

육당 최남선은 자기가 수집한 책과 주변 사람들이 맡긴 고서 등 약 17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1951년 4월 미군의 서울대공습 과정에서 모두 불타 소실되었다고 한다.

 

 

1914년 청춘에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소파 방정환(1920년 『개벽』에 '어린이' 사용)이 아닌 육당 최남선이다.

 

훈민정음, 즉 우리나라 말을 한글이라고 작명한 사람이 육당 최남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주시경 선생(1876~1914)이 조선어강습소(1908년, 한글배곧)를 세웠기 때문에 주시경 선생이 한글을 먼저 작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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