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조선 3대 천재에서 변절자가 된 춘원 이광수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

by 도생(道生) 2017. 5. 21.

조선의 3대 천재(동경삼재東京三才)에서 친일파 변절자가 된

춘원 이광수와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無情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 그리고 두 사람의 후손들은 역사의 큰 흐름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불행한 지식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춘원 이광수(1892~1950)는 1910년 단편소설 『무정無情』을 발표하고, 1917년 1월부터 6월까지 총 126회에 걸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 소설 무정은 1918년 단행본으로 간행된다.

 

 

 

후대에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불린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 춘원 이광수는 20세기 초 일본에 유학한 우리 동포 학생 사이에서 크게 주목받으며 동경삼재(東京三材), 조선의 3대 천재불렸다.

 

조선의 3대 천재(동경삼재)로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불린 육당 최남선이 친일파 변절자가 됐듯이,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쓴 춘원 이광수 역시 근대문학의 거장에서 대표적인 친일문학 작가의 길을 걸어간다.

 

 

 

 

 

 

 

 

 

 

 

 

이광수는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작농인 이종원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배우던 1902년 콜레라가 발생하면서 부모님을 여의고 여동생 둘과 함께 산다.

 

 

 

동학(1905년 천도교로 개명)에 입도하여 서기로 일하다가 천도교와 관련된 친일단체 일진회 유학생으로 1905년 일본에 건너간다.

1906년 귀국했다가 1907년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교 3년에 편입한다

 

춘원 이광수는 이때 벽초 홍명희, 육당 최남선과 함께 조선 3대 천재(동경삼재)로 불리게 된다.

 

 

 

 

 

 

 

 

 

 

 

큰 부잣집 아들이었던 육당 최남선이 엄청난 금액으로 1908년 신문관을 설립하는데 춘원 이광수도 글을 써 동참한다.

춘원 이광수는 1910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교사가 되고, 단편소설 『무정』 등을 발표한다.

 

1913년 만주와 상해, 러시아 등지를 돌아다니고, 1914년 다시 오산학교 교사로 복직한다.

1915년 인촌 김성수의 지원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하고 유학 중 유부남인 춘원 이광수는 나혜석과 허영숙 등과 교제를 한다.

 

 

 

 

1916년 와세다대학 본과 철학과에 입학하고, 191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 소설 <무정>을 연재한다.

 

1918년 부인과 이혼하고 허영숙과 재혼한 춘원 이광수는 일본으로 건너간 1919년 2.8 독립선언문을 주도적으로 작성하여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에 동참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잡지 『독립』 지의 사장 겸 편집국장 등을 맡으며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대한의 자주독립을 고취하는 글 등을 쓰며, 조선의 3대 천재(동경삼재)답게 뛰어난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1920년에는 흥사단에 입단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 내부의 견해차와 궁핍하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지 못한 춘원 이광수는 1920년 귀국하여 개벽 지에 글을 쓰고 종학원 교사로 일하며 지낸다.

 

 

 

 

1922년『개벽』 지에 발표한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유를 10여 가지로 지적하는데, 마치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담은 듯 모든 원인은 열등한 우리 민족에게 있다고 비하하고 비난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1924년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은 일제의 식민지 체제를 인정하는 반민족적인 글을 쓴다. 이광수의 글이 논란이 있자 1924년 동아일보를 그만둔다.

 

 

 

 

 

 

 

 

 

 

 

1925년 1926년 경성대학 법문학부 야간반에 입학했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된다.

1933년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가 춘원 이광수를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데려온다.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 단체 수양동우회는 춘원 이광수가 주도하여 만든 수양동맹회와 평양 대성학교 출신이 만든 동우구락부가 통합한 단체다.

 

 

 

1937년 멸망에 빠진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등의 내용을 담은 인쇄물을 배포하다 일제에 발각되어 6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나고, 무죄판결을 받는다. 

 

1940년 '가야마 미쓰오'로 창씨개명하여 일본 천황의 신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모두 창씨개명에 동참하자고 주장한다. 

 

 

 

 

 

 

 

 

 

 

 

1939년 친일 어용단체 조선문인협회 회장, 1941년 임전대책협의회 발기인,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이사, 1944년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1945년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등의 친일파 변절자로서 왕성하게 활동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발표하고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불린 춘원 이광수는 일제를 찬양하고, 신사참배, 징병과 징용, 내선일체, 창씨개명에 앞장서면서 강연에 적극적으로 나섰, 학도병 입대를 적극적으로 권유하며, 일본 천황에게 모든 것을 바치라고 외쳐대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친일파 변절자로서 맹활약한다.

 

 

 

 

 

 

 

 

 

 

한때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 변절자가 된 조선의 3대 천재(동경삼재) 춘원 이광수는 1949년 반민족특별위원회에 체포되었고, 3개월 만에 풀려난다. 1950년 6.25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10월 25일에 만포에서 지병으로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벽초 홍명희와 육당 최남선과 함께 조선 3대 천재(동경삼재)로 불렸던 춘원 이광수는 최남선과 함께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한 변절자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로 수록되어 있고,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친일파로 수록되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