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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환단고기와 안동 임청각 주인 석주 이상룡

by 도생(道生) 2019. 3. 16.

조국의 자주독립과 노예역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헌신한 안동 임청각의 주인 

『환단고기』와 인연이 깊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 원수) 석주 이상룡 선생

 

 

 

 

 

 

 

 

 

 

 

 

고성 이씨 집안의 후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 원수)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은 조선 철종 9년(1858) 안동 임청각에서 태어났습니다. 의병 활동과 계몽 활동을 하던 석주 이상룡 선생은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다음 해인 1911년 1월 안동 임청각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습니다.

 

 

만주로 망명한 안동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은 우당 이회영 선생 등 동지들과 힘을 모아 항일무장투쟁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를 설립합니다.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선생 등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는 백범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이 더 많이 걸렸단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선생을 비롯한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독립군 간부 약 3,500여 명을 배출한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요람이었습니다.

 

 

 

 

 

 

 

 

 

 

임청각을 처분하고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만주로 망명해 항일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한민족에게 두 정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서간도의 군정부(軍政府)를 군정서(軍政署)로 낮춰 개편했습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개편한 후 초대 국무령(국가 원수)으로 추대됐습니다. 국무령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온 석주 이상룡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32년 돌아가셨습니다.

 

 

안동 임청각이 수난을 당한 것은 석주 이상룡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의 일입니다.

1936년 일제는 석주 이상룡 선생이 태어나 자란 안동 임청각을 허물어 철로를 만들었습니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연결되는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직선 철로 대신 굳이 안동 임청각을 관통하게 했습니다.

 

중앙선이 석주 이상룡 선생 등 독립운동가 다수를 배출한 안동 임청각을 지나면서 10여 km을 더 돌아 구불구불한 철로가 만들어졌습니다. 일제는 안동 임청각 50채를 강제로 철거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이론과 군사훈련 등을 받는 한편 우리의 참역사와 문화도 공부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전체 교육과정의 절반이 민족 정신교육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정신을 군사훈련보다 두 배 이상 교육한 것은 민족정신을 함양케 하여 무장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함입니다. 

 

 

안동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13년 신흥무관학교 교재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정신을 담고 있는 『대동역사大東歷史』를 집필해 교재로 사용했는데, 안타깝게도 신흥무관학교 교재였던 『대동역사』가 발견되지 않고습니다.

 

 

안동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당시 교육을 받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모두 돌아가신 상황에서 『대동역사大東歷史』의 제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동역사』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데 바로 <서사록西徙錄>입니다.

<서사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안동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망명 일기입니다.

 

 

 

 

 

 

 

 

역사학자 이덕일 교수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서사록> 내용을 예로 들면서 '지식인의 예언자적 소명'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역사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나라의 체통을 높이고 국민의 정신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지금 노예사관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있으니 어찌 노예근성을 길러 참담한 지경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임청각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시문집을 아들 이준형 선생이 필사해 1973년 간행한 <석주유고>와 망명 당시 일기인 <서사록>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역사를 왜곡 조작할 것을 알았다는 듯한 내용이 나옵니다.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은 일제가 식민사학으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 조작하기 이전에 이미 기자동래설과 한사군 한반도설을 부정했습니다. 대한의 백성들이 일제가 조작해 만든 노예역사관의 포로가 될 것을 마치 눈앞에 벌어진 일을 보듯 말씀하셨습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석주 이상룡 선생은 "아아! 단군 이래 오천 년 역사는 영원하며 단절이 없다는 것을 의심치 않노라."라고 노래 부르시며 국조 단군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한사군의 옛터는 모두 요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주유고)

 

"대개 단군의 혈통은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로부터 연면히 이어져 3천 년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한 침상 위인데 다시 어디에 기씨(箕氏, 기자)가 코를 골며 잠잘 곳이 있었겠는가.

 

수사(隨史, 서)에 이르기를 (수양제가) '좌우 20만 대군을 현도, 낙랑 등의 길에서 나와서 압록강 서쪽으로 모이라'고 했으니 이에 근거하면 한사군의 땅은 압록강 이서(以西)를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리나라 사람들은 당초 사가의 격식이 없이 망령되어 노예의 근성으로 꾸며 찬술하는 솜씨를 남용하여 국가의 체통이 손상될 것을 생각지 않고 오직 타인을 숭배하는 데만 힘썼다."

(서사록 1911년 2월 24일)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은 고성 이씨 30세 손이고, 독립운동가 해학 이기(1848~1909) 선생은 고성 이씨 27세손입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역사관은 고성 이씨 집안의 대대로 이어온 역사관과 직접 관련이 있습니다.

 

 

해학 이기 선생과 석주 이상룡 선생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지은 행촌 이암 선생의 후손입니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를 지으신 일십당 이맥 선생의 고조부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지으신 행촌 이암 선생입니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지으신 행촌 이암 선생의 손자는 세종대왕 때 좌의정을 지낸 용헌 이원 선생입니다.

이원(李原) 선생의 여섯째 아들이 이증(李增) 선생이고, 이증 선생의 셋째 아들이 이명(李洺) 선생으로 조선 중종 14년(1519)에 안동 임청각을 지었습니다.

 

 

 

 

 

 

 

 

해학 이기 선생은 『환단고기』의 『태백일사』를 지은 일십당 이맥 선생의 후손으로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삼성기 上』, 『삼성기 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다섯 권을 감수했습니다.

 

해학 이기 선생이 설립한 단학회를 이어받은 2대 회장 운초 계연수 선생과 석주 이상룡 선생이 손잡고 1919년 <단학회보>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단학회 2대 회장은 해학 이기 선생의 제자 운초 계연수 선생으로 운초 계연수 선생은 해학 이기 선생이 감수한 다섯 권을 책을 묶어 1911년 『환단고기』를 편찬한 분입니다.

 

고려 시대 후암 이존비와 행촌 이암, 조선 시대 용헌 이원과 일십당 이맥 선생으로 이어진 고성 이씨 가문의 우리 참역사와 문화를 지켜온 숭고한 정신이 수백 년 동안 계승되어 석주 이상룡 선생과 해학 이기 선생의 자주적 역사관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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