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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한일병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

by 도생(道生) 2019. 8. 25.

일제가 '한일병합약' 또는 '한일합방조약'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한일병탄(韓日倂呑)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피탈(被奪) 당1910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

 

 

 

 

 

 

 

 

 

 

 

 

일본 제국주의는 친일파 매국노들과 야합하여 강압적이고 일방적으로 체결한 소위 '한일병합(韓日合倂)조약' 또는 '한일합방(韓日合邦)조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는 '합병(合倂)'이라는 용어가 강대국이 약소국을 강제로 합친다는 것과 두 나라의 관계만을 국한한다는 의미를 벗어 보려고 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일병탄(韓日倂呑) 국제사회가 인정하고 두 나라 간의 합법적인 조약이라는 것을 애써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한일병합조약' 또는 '한일병합조약'은 두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체결한 조약(條約)이 아니기 때문에 조약이 될 수 없습니다. 굳이 표기한다면 일본 제국주의가 친일파 매국노들을 내세워 강제로 체결한 것이기 때문에 늑약(勒約)이라고 해야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침탈하고 식민지배를 했기 때문에 한일병탄(韓日倂呑)이라고 해야 합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에 공식 공포한 소위 '한일병합조약' 또는 '한일합방조약'의 내용을 보면 한일병탄은 국제법상 무효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위 '한일병합조약' 문서 내용은 일제와 친일파들이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일본 제국주의 '천황'에게 순순히 나라를 바친다는 내용으로 만들었는데, 국가 간의 조약에 반드시 찍혀있어야 할 대한제국 국새(國璽)와 순종 황제의 친필서명이 없는 한낱 종잇장에 불과합니다.

 

'한일병합조약' 문서에는 국가 간의 조약에 인정되지 않고 나라의 행정적 결재에만 사용하는 어새(御璽)가 찍혀있다는 것은 조약의 공식 문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한일병탄은 무효가 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문서 날조는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 왜곡과 날조로 이어졌습니다.

왕정복고에 성공한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약 80년 동안 왜곡 조작한 일제 식민사관과 식민사학이 오늘날까지 식민사학을 신봉하는 자들에 의해 우리나라 역사로 둔갑해 왔습니다.

 

경술국치일 1910년 8월 29일에 공포해 현실이 된 한일병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해 식민지배를 준비한 것은 現 일본 총리 아베가 가장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면서부터입니다.

 

 

 

 

 

 

 

 

 

 

 

조선을 정벌한다는 소위 '정한론'은 일제 식민사관의 학문적 이론이 서서히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정치, 경제, 외교, 군사적으로도 조선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메이지유신으로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선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 곧 '정한론(征韓論)'을 펴기 위해 일방적인 통상요구를 했습니다.

 

 

1876년 2월 27일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한 이른바 '강화도조약'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공식 명칭은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입니다.

 

1882년 7월 19일 구식 군대와 신식 군대와의 차별 때문에 일어난 임오군란 때 고종은 청나라 군대 파병을 요청했고 임오군란이 끝난 후에도 조선에 군대를 주둔 시켜 조선 내정에 간섭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도 이때 신식 군대(별기군) 훈련 교관을 비롯해 일본인 10여 명이 죽었고,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는 피해를 봐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 공사관과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일본군을 조선에 주둔시켰습니다.

 

1882년 8월 30일 조선은 임오군란 당시 피해를 본 일본에 배상하는 이른바 '제물포조약'을 체결했고 조약에 따라 1883년 제물포항(인천항)이 개항합니다.

 

 

1884년 12월 4일 일본을 믿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박영효와 김옥균 등 개화파의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고, 이때 민씨 정권이 청나라 파병을 요청하면서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서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1885년 4월 18일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동시에 철수하고, 변란이 발생할 시 동시에 파병한다는 이른바 '톈진조약(천진조약)'이 체결됐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주의는 청나라와 일본이 체결한 '톈진조약'을 빌미로 일본군을 파병해 조선 군대와 함께 학군 30만 명을 무참하게 살육한 후 본격적으로 국권 침탈이 시작됐습니다.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2월 9일 일본의 요청으로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합니다.

1904년 223일 러일전쟁이 시작하면서 불안해진 일본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협력해줄 것을 강압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합니다.

  

 

1905년 7월 29일 일본은 대한제국을 미국은 필리핀을 각기 지배하는 것을 묵인하고 인정하는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가 극비리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합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은 고종 황제의 서명 날인도 없이 강제로 체결됐습니다.

일제는 이것을 소위 '을사조약' 또는 '을사보호조약'이라 부르는데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빼앗았으며, 1906년 2월 1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통감부 초대 통감으로 왔니다.

 

 

 

 

 

 

 

 

1907년 7월 18일 일제는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시키고, 7월 24일 일본 제국주의가 순종 황제의 서명 날인을 위조한 소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으로 대한제국의 행정권을 빼앗았고,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1909년 7월 6일 일본 제국주의 각의에서 식민지배는 기본이고 조선의 모든 것을 패멸(廢滅) 시켜 일본 것으로 만든다는 소위 '한일병합에 관한 건'이 확정됐습니다.

 

 

1909년 7월 12일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일본에 무조건 맡긴다는 소위 '기유각서(己酉覺書)'가 체결됐는데, 일제가 강압으로 빼앗은 것입니다.

 

1910년 8월 18일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이 주도한 내각회의에 소위 '한일합병조약안'을 상정해 통과시켰습니다.

1910년 5월 3대 조선 통감으로 임명된 데라우치가 1910년 8월 16일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과 조중응을 소환해 구체적으로 '한일병합조약' 체결 지시를 내립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단체 일진회 회원들이 거리 곳곳을 누비며 '한일합방'을 외치고 다녔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일진회를 동원한 것은 무력을 앞세워 강압적으로 국권을 침탈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이 '합일합방'을 원해서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인데, 일본 극우세력이 아직도 이런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 아래 대한제국 어전회의가 열렸고, 친일파 매국노들은 순종 황제를 허수아비 취급하며 반대하던 이용직을 쫓아내고 일방적인 찬성으로 '한일합방안'이 가결되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은 윤덕영을 시켜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어새를 찍게 하고 서명을 위조한 소위 '한일병합조약'을 공포했습니다.

 

1910년 8월 29일에 공포한 한일병탄의 소위 '한일병합조약'은 한일늑약 또는 경술늑약이라고 표기해야 합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우리나라 식민지배를 시작한 날인기도 한 경술국치일은 국권을 피탈(被奪) 당한 치욕의 날입니다.

 

 

 

 

 

 

 

 

 

한韓민족의 6천 년 역사에서 국운이 쇠하여 침략을 당하거나 주변국을 떠받든 사대 역사는 있었지만, 나라가 완전히 패망한 역사는 없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말처럼 치욕스러운 역사지만, 일제가 강제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한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해 한국 모든 것을 폐멸(廢滅) 시키려던 불의한 역사를 부정하고, 파렴치하고 악질적인 전쟁범죄도 무조건 부정합니다. 치욕스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일병탄이 시작된 19010년 8월 29일은 우리에게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경술국치일이지만, 일본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생긴 이래 가장 큰 죄를 지은 날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실상은 몸은 대한민국이지만, 정신은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 조작 말살해 만든 식민사학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제가 조작해 만든 식민사학을 청산하고 우리의 진짜 역사와 정신문화를 하루빨리 복원해 정체성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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