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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종도사님, 종도사님 도훈道訓 말씀

조계사 대웅전과 청와대 명칭 유래 및 증산도와 보천교

by 도생(道生) 2020. 12. 2.

항일투쟁기(일제강점기) 독립운동자금의 산실 보천교와 본전 십일전(十一殿)

조계종 조계사 대웅전과 대통령 관저 청와대 명칭 유래 및 증산도와 보천교

 

 

 

 

 

서력 1929년 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대흥리 인근 2만여 평의 부지 위에 당시 화폐로 백 수십만 원을 들여 십일전(十一殿)을 비롯한 사십여 채의 건물과 열 채의 부속 건물을 지었습니다. 보천교의 사십여 채 건물은 전형적인 궁궐 배치를 따랐습니다. 보천교(증산도의 전신)의 본전인 십일전은 경복궁 근정전의 두 배가 될 정도로 컸습니다.

 

보천교 십일전을 비롯하여 부속건물의 지붕에는 황금색 기와와 청기와를 올렸습립니다. 황금색 기와와 청기와는 일반 기와와 달리 안료도 비싸고 도자기처럼 가마에 굽는 전문 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에 제작이 어렵고 값도 비쌉니다. 또한 황금색 기와는 황제가 기거하는 곳에만 올릴 수 있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 시대 때도 궁궐 일부 건물에서 청기와만 사용했습니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항일투쟁기(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령 제83호 '포교 규칙'을 공포합니다. '포교 규칙 제1조 본령에서 종교라 칭함은 신도(神道, 일본), 불도(佛道) 및 기독교를 이른다.'라고 하여 일본의 신도, 기독교, 불교 외에는 모두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자금의 산실이었던 보천교는 1919년 당시 간부만 557,700명에 달하고 우리 민족의 3분의 1, 약 700만 명이 신앙했던 단체로 일제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1936년 소위 '유사종교 해산령'을 내리면서 보천교를 강제로 해산시켰고, 항일투쟁기 독립운동자금의 산실이었던 보천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증산도의 전신인 보천교 건물은 일본인에게 경매되어 철거되었고 십일전은 불과 500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십일전과 부속 건물의 지붕을 장식한 황금색 기와와 청색 기와 중 조선총독부는 총독관저를 장식하기 위해 청기와를 가져가면서 후일 청와대라는 명칭이 유래한 것입니다. 이후 일부는 정읍 내장사 대웅전, 보천교 본전 십일전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 대웅전이 되었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으로 서울 종로구에 있는 조계사는 서력 1910년 각황사에서 193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고, 이때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으로 절 이름을 태고사라고 했습니다. 경매로 해체된 보천교 십일전 자재는 1938년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넘어갔고 총본산 조계사 대웅전이 되었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본산 조계사 대웅전은 일반적인 불교 양식의 건물이 아니라 경복궁 근정전과 같은 궁궐 양식입니다. 조계사 대웅전은 서력 2000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산 내에 있는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서력 636년) 영은 조사에 의해 창건됐습니다. 내장사는 1,30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거듭했습니다. 정읍 보천교 본소의 정문이었던 보화문을 해체 후 매각되었는데 이를 사들여 1938년 현재의 위치에 내장사 대웅전이 지어졌습니다. 1951년 전쟁통에 불타고 1958년 중건된 후 2012년 10월 31일  내장산에 있는 내장사 대웅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대웅전이 전소됐습니다. 

 

 

증산도의 전신인 보천교 본전의 십일전 기와는 당시 조선 총독의 관전 기와로 올라갔습니다. 1990년 2월 20일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 청와대 신축공사를 할 때 '천하제일길지(天下第一福地)'라는 표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조선왕조에서 처음 도읍으로 정한 한양 도성, 5백여 년 동안 길지였을지 모르겠지만, 국권을 빼앗기고 초선총독부 청사에 가려지고, 통독 관저와 미군정 장관 관저, 역대 대통령 등이 비참한 말로를 겪은 터로 흉지(凶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인 청와대 명칭 유래는 본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후 경복궁 뒤쪽 언덕에 '무예를 구경하는 대'라는 명칭의 경무대(景武臺)가 시작입니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고 1906년 남산 왜성대에 조선 통감부를 설치했고,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성을 쌓았다는 남산 왜성대에 있던 일본공사관 자리는 통감 관저가 되었습니다. 조선 통감부는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은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했습니다. 서울 용산에 주둔했던 일본군 사령관의 관저도 제2의 조선 총독 관저로 사용된 적이 있었습니다.

 

 

 

1906년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통감부는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강제 병합한 후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일대를 철거한 후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완공하면서 옮겨갔습니다. 남산 왜성대 통감 관저는 1939년까지 통감과 총독의 관저로 사용되었고, 1939년 경복궁 뒤편의 경무대 자리에 조선총독부 관저를 신축하면서 정읍 보천교 십일전의 청기와를 가져다 올렸습니다. 청와대 명칭의 유래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 관저는 미군정 장관의 관사로 사용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 관저는 옛 이름인 경무대로 불리게 됩니다. 19세기 말부터 경무대로 불리기 시작한 현재의 청와대 자리는 항일투쟁기(일제강점기)를 제외하고 1960년 4. 19혁명까지 경무대로 불렸습니다. 1960년 12월 30일 윤보선 대통령은 그동안 경무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쇄신하는 의미에서 경무대라는 명칭을 버립니다. 미국 대통령 관저를 백악관과 비견될 수 있다는 윤보선 대통령의 의견에 따라 청색 기와를 덮은 집이란 의미의 청와대 명칭이 1961년부터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STB 스페셜 <대한독립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1부>

 

STB 스페셜 <대한독립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2부>

STB 스페셜 <대한독립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3부>

 

 

 

 

 

 

 

 

 

 

 

 

 

<보천교 학술대회 실황녹화 1부>

 

 

 
 
 
 
 
 
 

 

<보천교 학술대회 실황녹화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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