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주(北周)의 요동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 25세 평강상호태열제
평원왕의 딸과 장군, <환단고기>와 <삼국사기>의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삼국사기>는 고려 17대 인종황제의 명으로 12세기 중엽 김부식이 주도하여 편찬한 정사(正史)입니다. 혹자는 <삼국사기>는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관찬 사서로 어떤 사서보다 높은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일제가 주장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신봉하는 한국의 주류 강단사학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중화 사대주의 사상을 반영하고 신라 중심의 역사와 일부 과장한 면도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열전'은 총 10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69명입니다. <삼국사기 - 열전>의 1~3권은 신라의 김유신이 차지하고 있으며 '열전'에 등장하는 69명 중 신라인이 약 80%를 차지하는 56명이라는 사실만 봐도 단편적으로나마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신라 중심으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도 <삼국사기> '열전'에 나옵니다.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는 후대에 편찬된 역사서입니다. 조선 시대 <일성록>과 <승정원일기>는 당대에 편찬된 자료도 있지만, 대부분 역사서는 후대의 기록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수백 년에서 수천 년 후에 편찬된 자료이며 <조선왕조실록도>도 임금 사후에 편찬됐습니다.
<삼국사기> '온달전' 원문은 '시후주무제출사(時後周武帝出師) 벌요동(伐遼東), (해석) 이때 후주(後周) 무제(武帝)가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25세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 재위는 서력 559년부터 590년까지입니다.
<삼국사기>에 요동을 침략한 후주(後周)는 서력 951년부터 960년까지 존속한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 북주 멸망 후 약 300년이 흘러 생긴 나라가 후주(後周)입니다. 당시 고구려의 임금은 25세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였고, <삼국사기> '온달전'이 평원왕의 딸과 사위를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로 나오기 때문에 고구려의 서쪽 요동 지역을 침략한 나라는 서력 557년부터 581년까지 존속한 북주(北周)가 맞습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때는 12세기 중엽입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평원왕 딸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이야기는 약 500여 년이 지난 고려 시대에 쓰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오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 내용은 대제국(大帝國) 고구려 황제의 딸과 결혼하고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울 정도의 뛰어난 인물을 '바보'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 오류를 넘어 과장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혹자는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은 김부식이 직접 짓지 않고 누군가가 지은 기록을 <삼국사기>에 삽입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의 '온달전'을 직접 썼다면 6세기 '북주(北周)'와 10세기 '후주(後周)'를 분간하지 못했을 리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혹자가 '온달전'의 원저작자라고 주장한 사람은 후주(後周)가 건국된 10세기보다 약 2백 년이 앞선 8세기의 인물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고려 인종 황제의 명으로 김부식이 주도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과거의 기록을 참고한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김부식이 중화 사대주의와 신라 중심의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구려와 백제 역사를 명백하게 축소했고, '바보온달과 평강공주'가 등장하는 '온달전'처럼 의도적으로 과장한 내용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주류 강단사학은 고구려 25세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와 딸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역사를 말할 때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설화와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전투에 나가 전사한 야단성 등만 내세워 '야단성은 한강변 아차산성', '야단성은 단양 온달산성' 등 설화에 묵어 두고 한반도 역사로 국한하는데 급급합니다.
'북주 무제'가 침범한 요동은 고구려 영토의 서쪽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지만,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는 '고구려 정벌'이라고 의도적으로 해석해 놓았습니다. 북주(北周)는 중원을 통일한 나라도 아니고 중원의 일부를 차지한 나라였습니다. 북주가 멸망한 이후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는 100만 대군을 앞세웠지만, 패했고 당나라 이세민은 고구려와 전쟁에서 패한 후 양만춘 장군의 화살에 맞아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등 고구려와 전쟁을 벌일 때 총력을 다 쏟아부을 정도로 고구려의 국력은 막강했습니다.
<삼국사기> '온달전' 시(時), 후주무제출사벌요동(後周武帝出師伐遼東), 왕령군역전어배산지야(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온달위선봉(溫達爲先鋒), 질투참수십여급(疾鬪斬數十餘級), 제군승승분격대극(諸軍乘勝奮擊大克). 급론공(及論功), 무불이온달위책일(無不以溫達爲策一). 왕가탄지왈(王嘉歎之曰): "시오여서야(是吾女壻也)." 비예영지(備禮迎之), 사작위대형(賜爵爲大兄). 유차(由此), 총영우악(寵榮尤渥,), 위권일성(威權日盛).
이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산(拜山) 벌판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이 되었는데 힘을 다해 싸워서 참수한 것이 수십 급(級)이었다. 여러 군사들이 이긴 틈을 타서 맹렬히 공격해서 그게 이겼다. 전공을 평가하게 되자, 온달을 첫 번째로 삼지 않은 이가 없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고 말하고, 예의를 갖추어 온달을 맞이하였으며, 관작을 주어 대형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온달은)왕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가 날로 더해갔고, 위엄과 권세가 매일처럼 높아졌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침략했다는 <삼국사기>의 '온달전' 내용과 달리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 고구려국본기>에는 '북주(北周)의 무제(武帝)라고 제대로 밝혀주고, 온달장군이 북주를 물리친 장소와 전투 후 유림관 동쪽까지 차지했다고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평강상호태열제(平岡上好太烈帝) 유담력(有膽力) 선기사(善騎射) 내유주몽지풍(乃有朱蒙之風) 개원대덕(改元大德) 치교휴명(治敎休明). 대덕십팔년병신(大德十八年丙申) 제솔대장온달(帝率大將溫達) 왕토갈석산(往討碣石山) 배찰산(拜察山) 추지유림관(追至楡林關) 대파북주(大破北周) 유림진인실평(楡林鎭印悉平) 유림(楡林) 금산서경(今山西境)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는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주몽(고주몽성제)의 기풍을 닮았는데 연호를 대덕이라 고치고 나라를 다스림과 가르침이 아주 밝았다. 대덕 18년 병신에 평강상호태열제가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갈석산, 배찰산을 토벌하러 가서 추격 끝에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쳐부수니 유림진 동쪽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유림은 지금의 산서 경계이다. <환단고기 - 태백일사 - 고구려국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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