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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고구려 장수왕이 비문에 새긴 해모수와 고주몽과 광개토태왕 관계

by 일신우일신 도생 2021. 10. 24.

고구려 장수왕이 비문에 새긴 북부여 해모수와 고주몽과 광개토태왕의 관계는

한민족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담고 있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일제 식민사학 4세대인 송호정은 '우리 민족사의 실제 역사상 출발, 시조로서의 의미는 동명(부여)에게 있다'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송호정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부여사에 문외한입니다. '단군은 신화다'라고 주장하는 송호정이 고조선 역사와 부여사를 연구할 때 중국 문헌인 <사기>, <삼국지< <후한서>, <위서>, <신당서> 등에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 사료와 교차 검증도 필요하지만, 1차 사료를 배제한 채 소중화 의식과 식민사학에 매몰되어 주객을 전도시킨 것입니다.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주류 강단사학계에 고구려의 1차 사료인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은 식민사학과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제외해야 할 자료입니다. 설령 광개토태왕비문을 인용한다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조선총독부 역사관에 근거하여 해석합니다.

 

 

한국 주류 강단사학은 광개토태왕비문에 새겨진 글을 일제 식민사학의 논리를 적용하여 해석하는 바람에 누가 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 자의적인 해석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주류 강단사학은 학계의 '통설', 학계의 '중론', 학계의 '공식적 입장'이라는 방패막이를 내세우고 있지만, 어리석고 무지하며 밥그릇만 챙기기에 바쁜 조선총독부 노예사관이라는 민낯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먼저 한국 역사학계는 해모수와 고주몽의 관계를 부자관계로 엮어버렸습니다. 고구려에 관한 사료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비문은 누가 뭐라 해도 고구려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1차 사료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시작과 발전 과정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설령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과장했다 치더라도 고구려 왕조의 계보, 즉 고씨 집안의 족보는 마음대로 조작할 수 없습니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은 서력 414년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려 거대한 비석에 공적을 기록한 1,802글자 중에서 훼손되거나 조작 가능성이 있는 글자와 논란이 있는 글자를 제외하고, 누가 봐도 확인과 해석이 가능한 글자도 많습니다. 고구려 혈통의 비밀을 알 수 있는 대목은 "환지십칠세손(還至十七世孫)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구절입니다.

 

 

고구려 시조로부터 혈통의 비밀을 담고 있는 광개토태왕비문의 '환지십칠세손'과 전후 글을 요약하면 '대주류왕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렸다.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북부여 해모수로부터) 17세손을 내려와서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올랐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무식한 건지 무모한 건지 한국 주류 강단사학은 광개토태왕은 고주몽과 유리왕을 뺀 17번째 왕, 포함하면 19번째 왕, 즉 '17세손'을 3대 대무신왕으로부터 17번째 왕위 계승이라고 아전인수격으로 엉뚱하게 해석합니다. 장수왕은 광개토태왕비문 첫 문장에서 고구려 건국자인 고주몽을 시작으로 유리왕 등 왕실 계보를 언급했는데 굳이 3번째 군주인 대무신왕 특정해서 17대라고 해석하는 것은 억지 해석입니다.

 

 

고구려 왕위는 형제와 종손 상속까지 포함해서 장수왕이 왕위 계승으로 20대입니다. 414년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아버지인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려 현재의 만주 집안현에 세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에서 '출자북부여(出自北夫餘), 북부여에서 나왔다'라고 했기 때문에 원시조는 북부여의 해모수 단군입니다.

 

 

<환단고기>의 <삼성기 上>에서는 "사해모수(祠解慕漱) 하사 위태조(爲太祖) 하시고.... 해모수를 태조로 삼고 제사를 올렸다."라는 기록은 고구려의 원뿌리는 북부여, 고구려 태왕들의 원시조가 해모수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광개토태왕비문은 해모수 단군으로부터 17세손(대손)인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뿌리가 어디인지, 해모수 단군과 고주몽 성제의 관계, 해모수 단군과 광개토태왕의 관계 등을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강단사학도 '고구려가 북부여에서 나왔다'라는 내용과 '광개토태왕은 고주몽 성제의 직계 13세손이다'라는 내용은 여러 기록에 나오기 때문에 부정하지 못합니다. <삼국사기>는 따로 '부여사'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와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잡지> '지리지' 등에 부여의 역사 기록이 나옵니다. <삼국유사>는 짧은 글이지만, <기이> '북부여'편이 있고, '동부여', '고구려', '탑상', '남부여와 전백제와 북부여'편 등에서 부여의 역사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혈통이 얽혀있기 때문에 해석하기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광개토태왕의 공적을 기려 세운 광개토태왕비문에는 해모수와 고주몽과 광개토태왕의 관계를 더 자세하게 밝혀준 유일한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다시 말해 <환단고기> 내용과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은 일치합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해모수 단군은 BCE 239(임술년) 북부여를 건국했습니다.

 

 

 

 

 

 

해모수 단군의 현손인 고주몽이 BCE 58년 북부여(졸본부여) 7대 단군으로 즉위하여 다물(多勿) 연호를 사용했고, BCE 37년 나라 이름을 고구려, 연호를 평락(平樂)으로 바꾸었습니다. 장수왕은 광개토태왕비문에 아버지 광개토태왕은 19대 왕이지만,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 시조로부터 17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혀 놓았습니다. 광개토태왕비문과 일치하는 역사서는 <환단고기>가 유일합니다.

 

 

고구려의 뿌리인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 단군의 4대손이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 '환지십칠세손'이란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은 시조인 북부여 해모수로부터 17대손이라는 뜻입니다. 일제 식민사관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임나일본부설', '한사군 한반도설' 등을 진리로 여기며 노예사관에 빠져 사는 한국 주류 강단사학은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으로 쓰인 역사서라 고구려 역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하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한다고 적반하장식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환단고기 북콘서트 창원편: 10회 환단고기, 한국사의 진실을 밝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zQmjHLJv8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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