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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B 상생방송

창녕 조씨 시조 조계룡과 중시조 조겸의 후손 조선의 대학자 남명 조식

by 도생(道生) 2023. 2. 18.

《한국의 성씨 31회》

창녕 조(曺)씨 시조 조계룡과 중시조 조겸의 후손 조선의 대학자 남명 조식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倭軍)이 놀란 것 중 하나가 농사짓고 생업에 종사하던 일반 백성들이 병사가 되어 전쟁터로 나온 의병(義兵)입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었지만, 7년의 전쟁 동안 왜군을 상대로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리며 나라와 가족을 위해 활약한 의병의 존재는 두려움이 대상이 됩니다.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의병(義兵)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국가적 위기였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이면서 손주사위인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한 50여 명의 제자가 붓을 버리고 의병(義兵)이 되었습니다. 남명 선생은 조선 왕조 5백 년 역사에서 실천적인 학문을 가르친 대학자였습니다.

 

 

문정왕후는 조선의 13대 임금인 아들 명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었습니다.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과 첩실 정난정이 문정왕후의 비호 속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사리사욕을 채웠고 백성들의 원성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1555년 본래 벼슬을 하지 않았던 남명 조식 선생이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목숨 걸고 임금에게 사직 상소인 '단성소(丹城疎)'를 올려 임금(명종)과 문정왕후, 그리고 윤원형과 조정의 관료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조선 15대 왕 광해군은 남명 조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칼 찬 선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  '실천주의 학자', '조선의 참선비' 등 남명 조식 선생을 말할 때 여러 수식어가 붙지만, 임진왜란과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등을 거치면서 남명학파의 학맥이 끊겨버렸습니다.

 

 

창녕 조씨는 우리나라 토착 성씨입니다. 사료가 많지 않아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일부 학자는 창녕 조씨 시조 조계룡은 신라 선덕여왕의 남편이라고 합니다. 창녕 조씨 족보에는 신라 진평왕으로부터 조계룡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시조 이후 세계(世系)가 실전되었습니다.

 

 

신라가 망할 때 벼슬한 조흠은 신라의 신하로 남겠다면 토함산으로 들어가고, 조흠의 아들 조겸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딸인 덕공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됩니다. 창녕 조씨는 조겸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창녕 조씨 중시조 조겸 이후 고려 말까지 다수의 문무관(文武官)을 배출하며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됩니다.

 

 

 

 

STB상생방송 《한국의 성씨 31회》

창녕 조(曺)씨 시조 조계룡과 중시조 조겸의 후손 조선의 대학자 남명 조식

https://www.youtube.com/watch?v=U4Uk-AuvV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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