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 글

파락호破落戶라는 불명예를 얻으면서도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한 김용환 선생

by 도생(道生) 2014. 2. 16.

파락호破落戶라는 불명예를 얻으면서도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한 김용환 선생

 

조선 중기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은 학봉 김성일,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병사하였다. 학봉 김성일의 13대 종손이 김용환이다.

 

일제강점기 파락호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김용환 선생.

명문가 집안의 자손이며 재력도 있었는데 왜? 김용환 선생은 노름판을 전전하며, 집안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행동을 하며 살았는가?

 

일반적으로 파락호破落戶는  재산과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 집안의 재산을 탕진하는 난봉꾼을 말한다.

일제강점기 파락호의 대명사로 조선의 노름판을 돌면서 가장 큰 손으로 유명세를 떨친 김용환 선생.

 

 

김용환은 밤새워 노름을 하다가 돈을 따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고, 돈을 잃게 되면  "새벽 몽둥이야!"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 소리가 끝나는 동시에 몽둥이를 든 그의 아랫사람들이 놀음 현장을 덮쳐 판돈을 챙기면, 김용환은 그 돈을 들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논과 밭 18만평(현재 시가 약 200억원)을 팔아 노름판에 탕진하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로 실패했지만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까지 팔려고 하였습니다.

김용환은 급기야 무남독녀 외동딸이 시집을 가서 시댁에서 농을 사오라고 받은 돈 마저 노름돈으로 탕진하고 대신 집에 있던 헌 농짝을 보내줍니다.

 

윤학준(前 일본 법정대 교수)의 "양반동네 소동기"란 책에서는 우리나라 근대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운동 투사였던 김남수, 그리고 김용환을 꼽을 정도였습니다.

 

평생을 아버지를 원망하고 살았던 딸 김후웅은 아버지에게 올리는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기니 청송 마평 서씨 문중에 혼인을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떡쑥떡.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심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꼬,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김용환 선생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4월 2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떠난 후 여러 증언을 통해 노름 돈으러 탕진한 줄 알았던 집안 재산이 모두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들어간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김용환은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얻는 대신에 몰래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노름꾼으이 되어서라도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직 한 마음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 뿐이었습니다.

 

김용환이 어렸을 적, 할아버지 김흥락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회락을 숨겨줬다가 왜경들에게 발각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흉악무도한 왜경들게 종가 마당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 김용환은 그 이후부터 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합니다. 식구들이 고초를 당하지 않으려면 그 일은 은밀히 진행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김용환 선생이 숨을 거두기 직전, 그의 오랜 지기가 이제는 말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권유했지만, 그는 "선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네, 아무 말도 하지 말게나" 하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반세기가 지난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용환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게 됩니다. 김용환 선생이 파락호라는 누명을 얻으면서까지 지키려했던 이 나라.

우리는 그 소중함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광복후 근 70년 세월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에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할 가지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가장 소중한 목숨과 그 밖의 많은 것들을 바쳐서 희생하신 독립운동가들의 자손들은 대부분 그 삶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어렵게 산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라를 팔아먹고 나라를 배신한 민족반역자의 자손들은 잘 먹고 잘 산다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의 정치(입법부,사법부,행정부),경제,사회,문화,교육 등 전방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입법부와 사법부, 행정부가 여론에 떠밀려 친일재산환수를 한다고는 하나 재판에 져도 그들은 여전히 호위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라의 건국일인 개천절에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는 나라,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도 남의 나라가 왜곡하고 말살한 역사를 절대적으로 믿고 자신의 뿌리 역사를 부정하는 나라, 뿌리가 없는 나라로 전락하다보니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은 없어지고, 외래의 사상과 문화에 빠져 자신들의 정체성은 잃어버리고 나라의 큰 줄기인 충효예가 사라지고 있는 지금, 만약 과거와 같은 위기가 닥친다면 과연 누가 목숨 걸고 싸울것이며, 김용환 선생 같은 사람이 얼마나 나올 것인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