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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단재 신채호 선생은 민족의 얼을 부활시킨 역사 혁명가(한반도 사관을 깬 자주적 역사의식)

by 도생(道生) 2014. 3. 26.

단재 신채호 선생은 민족의 얼을 부활시킨 역사 혁명가

한반도 사관을 깬 자주적 역사의식

 

 

단재 신채호 선생은 한국인의 정신을 일으켜 세운 사상가이자,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한민족의 길을 밝히고 몸소 실천했던 혁명가였다. 뿐만 아니라 언론인이었고 근대의 대표적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역사가 있고, 정신이 생동하는 역사가 있으면 그 민족은 반드시 일어섬을 굳세게 믿고 있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 그는 우리 국민들이 상처뿐인 우리 역사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신채호 선생에게 "대한의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그의 삶 도처에 반영되었다. 한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려 동분서주했던 역사가인 그의 절규가 이를 증명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고대사 연구는 "독사신론(1909)"의 발표로부터 "조선상고사문화사" 및 "조선상고사" 저술이 중심이 된다.

이 가운데 마지막에 발간된 "조선상고사"는 새로운 역사이념과 인식체계를 제시하여 고대사 연구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단재 선생은 단군, 부여, 고구려로 계승되는 역사인식체계와 그 역사무대로서 만주를 중요시하였다.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부여족의 식민지로서 중국대륙의 일부까지를 우리의 역사로 수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사군의 반도 외 존재설과 전.후삼한설 등을 새롭게 주장하였다.

만주 중심의 단군 이해는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체계화 및 발해(대진국)사의 한국사와 관련되고, 또 만주 중심의 밑바탕에는 한말 일제하에 전개된 만주의 우리 국토화 운동과 독립운동의 기지화 운동과 연결된다.

 

또한 한국의 상고문화에 대한 자존적인 인식이 뚜렸하다.

단군왕조를 강조하고 우리의 상고문화가 중국을 능가하는 우수한 문화임을 강조하는 여러 사례들이 기술되어 있다.

이는 중국에 대한 문화사대와 일제의 식민지 상황을 철폐하려는 자주적인 역사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김부식 등 사대주의 역사가와 한국사의 타율성론을 강조하였던 식민사관론자들은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보고, 그 역사무대도 한반도가 중심이라고 애써 강조하였다.

단재 선생은 이런 종래의 한반도 역사무대를 만주, 요동반도 및 요서지방과 중국 동북지대까지 확대한 것이다.

 

 

조선상고사 : 1931년 조선일보 학예란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것을 1948년 종로서원에서 출판한 책이다.

이 책은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까지를 서술하였으며, 모두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론, 수두시대, 3조선 분립시대, 열국 쟁웅시대, 대(對) 한족(漢族) 겨전시대, 고구려 전성시대,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고구려 백제의 충돌, 남방제국 대 고구려 공수동맹(攻守同盟), 3국 혈전의 시작, 고구려의 수(隨)에 대한 전역(戰役), 고구려의 당(唐)에 대한 전역,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으로 각 편이 구성되었다. 각 편에는 새로운 역사이념과 인식체계를 제시하여 고대사 연구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단재 신채호(1880 ~ 1936)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도리미 마을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자 충북 청원군 고두미 마을로 옮겨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19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한일 강제병합이 되던 1910년 4월에 망명 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에 반대하였으며, 1923년 의열단의 이념과 운동방향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은 항일민족운동사상 가장 강건하고 웅혼하면서 정교하게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향을 체계화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문서로서 손꼽히고 있다.

1924년부터 동아일보 등에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등의 논문을 발펴하였고, 이 논문들은 1930년대에 "조선사연구초" 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여졌다.

 

1928년 대만의 기륭항(基隆港)에 상륙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여순(旅順)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어 복역하였다.

1936년 2월 21일 가장 위대한 근대 민족주의 역사가요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국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자신을 순국의 제물로 거룩하게 바치니, 향년 57세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자신의 혼백을 다 받쳐 독립하고자 했던 조국 대한민국으로부터 광복 후 17년 만에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됐으며, 무국적자로 떠돈지 97년 만인 2009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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