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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道典

동서양 종교사상의 첫 조우,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 천주란 무엇인가, 곧 상제이다

by 도생(道生) 2014. 6. 26.

동서양 종교사상의 첫 조우(遭遇)

마테오 리치(이마두) 신부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천주(天主)란 무엇인가, 곧 상제(上帝)이다'

 

 

 

 

마테오 리치가 황제와 자주 만난다는 과장된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리치를 집으로 초대하여 다양한 문제에 관하여 토론을 벌였다. 그래서 리치는 새로운 벗을 많이 사귀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지조(李之藻)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 이지조는 매우 총명한 사람으로 특히 지리학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리치는 그에게 해시계와 관상의(觀象儀) 제작법을 가르쳤다. 이 일을 계기로 자극을 받아 스승 클라비우스의 일궤측시학과 관상의, 실용수학 등을 한문으로 편역했다.

 

리치는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는 공세적이었으나 유교에 대해서는 친화적이었다.

그는 중국 전통의 유교 경전에 나타나는 '천(天)' 또는 '상제(上帝)'를 천주교에서 일컫는 하느님과 같다고 보았다. 유교의 상제와 기독교의 하느님은 결코 다른 신(神)이 아니라 같은 신에 대한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천주교 교리는 결코 중국 전통의 유교적 세계관과 윤리관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유교적 세계관을 더욱 완전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리치는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1603년 중국 사상과 기독교의 사상을 대비하여 양자가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이라는 의견을 정리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출간했다. '천주실의'(Do Deo Verax Disputatio)란 '하느님에 관한 참된 논의'라는 뜻이다. 

리치는 여기서 기독교와 유교를 연결하려 했으나 불교와 도교는 배척했다. 유학에서 중시하는 자기수양을 강조하여, 군자는 하느님을 믿고 섬긴다고 했다.

 

천주실의에서 리치는 중국 일반인들의 수신(修身) 교과서인 유학 경전들을 원용하면서 기독교의 교리를 유교의 용어로 기술했다. 그리고 중국의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동양적 기독교의 모형을 그려 내었다.

(상생출판, 양우석 '천국문명을 건설하는 마테오 리치' 中)

 

 

 

  천주실의 中          초기 기독교 성경

 

 

 

천주(天主)란 무엇인가? 곧 상제(上帝)이다.

 

베이징 입성을 향해 북진(北進)하는 동안, 마테오 리치는 한문 저술을 통한 선교가 중국을 위시한 조선과 일본 등의 한자문화권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 입국시의 판단과는 달리 중국 사회에서는 승려의 지위가 낮으며 또한 불교보다는 유교가 그리스도교와 친화력이 있다고 판단한 마테오 리치는, 승복을 벗고 사대부의 복식을 하여 학문을 구하는 유학자로 행세하기 시작한다. 사대부의 복식은 리치 신부가 선비와 관료, 왕족 등의 상류층과 교류할 기회를 넓혀 주었으며 상류층 선교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비상한 기억력과 언어 능력으로 단기간에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된 마테오 리치 신부는, 먼저 친분을 나누게 된 중국인 관료에게 우정과 사교에 대한 서양의 금언을 모아 '교우론'을 저술하여 선물한다. '교우론'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선비와 관료 계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가 중국 사회에서 마테오 리치의 입지를 크게 넓혀 준다. 인간성에 뿌리를 둔 이 '우정'이라는 화제가 서양과 동양을 잇는 최초의 책제목이 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 마테오 리치는 이미 중국 사회에서 명사(名士)가 되었는데, 리치가 명성을 얻게 된 이유는 서양인에게 대한 중국인들의 호기심, 그가 보여주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뚜이난 기억력, 사서오경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풀이해준 놀라운 지적 능력 등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명성과 더불어 황제의 관심을 사기 위해 여러 차례 선물 헌상 등의 노력으로, 1601년 리치 일행은 베이징에 입성하게 된다.

 

 

 

 

예수회 일행은 당시 황제인 만력제의 인정을 받아 베이징의 영내에 거주할 수 있는 허가를 얻게 되고 또한 황제로부터 녹봉까지 지급받게 된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밖의 세계에 대한 지리적 지식을 알리고 은연중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계적 보편성을 전하고자 세계전도인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한다. 또한 한문으로 된 최초의 교리문답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인간과 인생에 대한 윤리적 고찰인 25언,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담은 기인畸人 10편, 기하학을 소개하는 기하원본』 등의 저술을 연달아 출간한다.

 

 

 

 

『천주실의』의 서문은 '천주란 무엇인가, 곧 상제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천주실의를 통하여 마테오 리치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초기 유교의 상제 신앙과 그리스도교의 천주 신앙의 동일성이다.

중국 선비와 서양 선비의 문답으로 진행되는 이 책에서, 리치는 불교와 도교의 공(空)과 무(無)의 개념을 비판하고, 유교의 상제(上帝)가 곧 그리스도교의 천주(天主)라고 이야기 한다. "옛 경전들을 보니 상제와 천주는 단지 이름만 다를 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결론짓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천국과 지옥, 내세관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당위성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한문으로 쓰여진 최초의 그리스도교 서적인 『천주실의는 어떤 파장을 일으켰을까?

동서양 종교사상이 본격적으로 조우한 첫 번째 책인 천주실의』는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과 일본에도 유입되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천주와 상제의 동일성을 알려 많은 사람들을 가톨릭(카톨릭)으로 개종할 수 있게 하려는 그의 의도가 효과적으로 관철되지는 않았다.

 

 

마테오 리치는 근 30년 동안 전도를 위한 혈성 어린 노력을 하였으나 중화사상의 견고한 벽을 넘지 못한 채, 단지 중국 땅에 새로운 기술과 유용한 지식을 가진 인재로서 황제의 필요에 따라 쓰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들어온 성직자, 구언자로서는 인식되지 못한 것이다. 서구 가톨릭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리치의 선교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중국 사회에서 개종한 사람의 숫자는 황제를 비롯한 지배계층이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을 만큼 미미한 수치였으며 개종한 소수위 사람들조차도 친분이나 '상제신앙'이라는 주장에 거부감 없이 응한 것일 뿐 신앙의 열정을 갖춘 진정한 의미의 개종자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천주실의』를 비롯한 한문 저술들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퍼져 서양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최초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였지만, 이를 계기로 촉발된 서양을 둘러싼 여러 논쟁들은 곧 서양의 형이하학, 즉 기술은 쓸만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형이상학, 즉 종교는 논쟁거리도 되지 않는 수준 이하의 것이라는 결론으로 구결된다.

 

더구나 천주(天主)는 곧 상제(上帝)라는 마테오 리치의 주장과, 중국 현지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유교에 적응하여 친화력을 가지고 유교와 그리스도교를 양립시켜 나가야 한다는 마테오 리치의 입장은 그의 사후에 가톨릭 세계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전례전쟁'을 가져와 예수회의 존립을 건 투쟁으로까지 비화된다.

 

 

 

 

이를 두고 【마테오 리치저자인 히라카와 교수는 영국의 역사가인 샌 섬의 입을 빌어 이렇게 이야기한다.

"중국에서 선교단의 역사를 개관해 보면, 위대하고 실로 고귀한 노력이 아주 작은 결과밖에 이루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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