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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道典

살아있는 부처, 석가모니의 환생이라고 믿었던 진묵대사

by 도생(道生) 2014. 9. 3.

살아있는 부처, 석가모니의 환생이라고 믿었던 진묵대사

 

 

 

 

조선 인조(조선 16대 임금, 1595~1649) 때의 승려 진묵대사(1562~1633).

이름은 일옥(一玉)이다.

당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석가모니가 진묵대사의 몸을 빌려 환생하였다하며 생불(生佛)이라 불렸다.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하고 신통력으로 많은 기이한 일을 행하였다고 한다.

 

 

진묵대사는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났으며, 7세에 출가하여 불경을 한번 읽으면 바로 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내용까지 알아서 스승을 두지 않았다고 전한다. 72세인 1633년에 입적(入寂)하였으며, 진묵대사 어록(語錄)이 전해 내려오고다.

 

 

진묵대사가 태어나신 전북 김제 만경 불거촌(佛居村)은 진묵대사가 출가한 뒤 3년 동안 초목이 말라 시들었다고 한다.

평소 비린내가 나는 음식과 마늘을 좋아 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지혜롭고 자비로워서 동네 사람들이 "불거촌에 부처님 났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진묵대사와 두 자매가 모두 세상을 떠나더라도 길이길이 만인의 향화 참배를 받게 되도록,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자손이 없어도 천년 동안 향화를 올릴 명당자리)를 찾아서 어머니를 모셨다.

 

 

모든 법을 합하여 쓰심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 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震默)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끌렀으리라.’ 하니

이는 선도와 불도와 유도의 법술(法術)이 서로 다름을 이름이라.

옛적에는 판이 작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7)

 

 

살아있는 부처, 진묵대사

하루는 절에서 불사를 하는데 불당을 관리할 사람을 뽑아야 했다.

진묵대사가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려 대중들은 한결같이 진묵대사에게 그 일을 맡겨 보라고 청하였다.

"진묵이 나이도 어리거니와 행동이 가장 바릅니다. 그에게 부전을 시켜 불단을 호위하고 향로를 받드는 소임을 맡김이 좋겠습니다."

주지스님이 진묵대사의 의중을 떠 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야 시켜 주시면 하겠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 주지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밀적금강신(절 입구의 문이나 전각의 좌우에 서서 부처님을 수호하는 신)이 나타나 주지스님에게 말햇다.

"일옥 스님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모구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들인데 오히려 부처님에게 예경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빨리 부전 소임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 주시기 바랍니다."

 

주지스님은 잠에서 깨어난 후 비로서 진묵대사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날이 밝자 속히 다른 스님에게 부전을 맡겼다. 그 후 밀적금강신이 다시 주지스님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이제야 안심하고 부처님의 호위 소임을 다하개 되었습니다. 앞으로 그러한 일이 없도록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많은 사람들이 진묵대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한다.

 

 

한 그릇의 물로 해인사의 불을 끄다.
하루는 진묵대사가 점심 식사를 하다 말고 갑자기 물을 찾는 것이었다. 시중을 드는 사람이 급한 마음에 쌀뜨물을 가져다 드리니, 그 뜨물을 입에 한 모금 물고는 동쪽을 향해 내뿜었다. 그러자 쌀뜨물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 후 진묵대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식사를 계속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때 합천 해인사에 큰 화재가 일어나 절이 다 타게 되었는데 난데없이 서쪽에서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소나기를 퍼부어 화제를 진압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그 빗물은 모두 희뿌연 색깔을 띠고 있었으며, 그 빗물이 묻은 곳은 허옇게 얼룩이 남았다고 한다. 마침 그 불이 일어난 시간이 진묵대사가 점심식사 중에 쌀뜨물을 머금어 뿜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모기떼를 없애다.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하던 여름 날 모기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것을 본 진묵대사가 산신령을 불러 명하기를

"앞으로는 모기를 이곳에 머물지 못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 혼을 내줄 것이다."

진묵대사가 산신령에게 명하여 모기를 쫓게 한 이후, 그 마을에는 영영 모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오셨다고 하며 진묵대사의 효심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죽은 물고기를 살리다.

진묵대사가 가는데 소년들이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매운탕을 끊이고 있는것을 보시고,

"이 무고한 고기들이 고생을 하는구나."

이에 한 소년이 스님은 먹고 싶지 않냐며 비아냥 거리며 말을 하자, "나도 잘 먹는다." 하시며 그 매운탕을 모두 드신 뒤 냇가에 가서 뒤를 보니 물고리가 모두 살아서 헤엄쳐 갔다고 한다.

 

동료 스님들이 진묵대사를 골탕 먹이려고 할 때 바늘을 국수로 만들어서 먹은 이야기 등 진묵대사의 놀라운 행적이 아직도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선천 종교의 종장을 교체하시고 종교문화를 통일하심

선도와 불도와 유도와 서도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근원이 되었나니

이제 최수운선도의 종장(宗長)이 되고

진묵불도의 종장이 되고

주회암유도의 종장이 되고

이마두서도의 종장이 되어 각기 그 진액을 거두고

모든 도통신(道統神)과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려 각 족속들 사이에 나타난 여러 갈래 문화의 정수(精髓)를 뽑아 모아

  통일케 하느니라.

이제 불지형체(佛之形體) 선지조화(仙之造化) 유지범절(儒之凡節)의 삼도(三道)를 통일하느니라.

나의 도(道)는 사불비불(似佛非佛)이요, 사선비선(似仙非仙)이요, 사유비유(似儒非儒)니라.

내가 유불선 기운을 쏙 뽑아서 (仙)에 붙여 놓았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8)

 

 

진묵대사 설화 형성배경(출처 - 불교 저널 2011년 5월 13일)

진묵대사에 관한 일화들이 과연 사실인가 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스님과 관련된 많은 설화에는 적어도 상당한 부분이 그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민초들이 그들의 염원을 진묵의 삶과 사상에 가탁(假託)하였다면 그것 또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사실보다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동시대 뿐 아니라 시대가 진행되면서 더욱 진묵의 사상과 일화가 과장되고 변개되며,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가 보강되고 첨가되어진다면 그것은 또한 상당한 함의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진묵설화의 형성에는 두 가지의 커다란 배경이 있다.

하나는 기축옥사라는 중앙 정부에 의해 무참하게 호남지역이 유린된 역사적 사건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숭유억불 정책이다.

 

주지하듯이 진묵이 살았던 시대는 국내적으로는 사림세력이 정권을 잡고, 계속된 당쟁사회가 만연된 시기였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임진왜란(1592)이 있었으며,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이라는 수치스러운 큰 변란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일어난 '정여립의 난'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이 가슴앓이는 이곳의 풍토나 인성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면서 현세에서는 결코 풀릴 수 없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진묵이 살던 시기는 숭유억불 정책도 그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국가는 민중들에게서 불교를 신앙하는 권리를 박탈했다. 그 결과 불교 교단은 공식적으로는 국가나 사회 체제 내에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였기 때문에, 민중들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깊은 산 속으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호남민중들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는 핍박과 냉대와 착취를 당하고, 종교적으로는 신앙의 권리를 빼앗기게 된다...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당시의 호남민중들이 진묵으로 대표되는 불교에 대한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 더 나아가서 진묵에게 그들의 시각을 투영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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