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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道典

증산도 도전 - 안중근 의사 이등박문 저격

by 일신우일신 도생 2016. 1. 13.

증산도 도전道典 - 천지공사

안중근 의사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 저격

 

 

 

 

 

 

 

 

 

 

1895년 무지막지한 일본에 의해 조선의 국모(國母) 민중전(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이 시해될 때 일본의 총리대신은 이등박문이었고, 당시 시해를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미우라 고로 일본공사의 임명권자도 이등박문이었다. 

 

 

이등박문은 대한제국을 침략한 민족의 원흉이었지만, 일본 제국주의 근대화의 주역이었으며 현대 일본의 기초를 쌓는 데 공헌한 인물이었다. 이등박문은 일본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독의 지위에 있었고, 작위도 생전 백작에서 사후 최고 작위인 공작에 추증되었다. 그의 직위와 작위가 보여 주듯 이등박문은 일본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이등박문은 일본 제국주의 제1대, 제5대, 제7대, 제10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제1대, 제3대, 제8대, 제10대 추밀원 의장, 귀족원 의장 등을 지냈다.

 

 

일제가 1905년 대한제국(大韓帝國, 조선)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강제적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사늑약)을 일본 제국주의와 대한제국이 동등하게 체결한 협약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그동안 을사조약(을사조약)이라고 사용해 왔다.

일제가 강압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910년 한일강제병탄으로 한반도를 완전한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은 일본 특명전권대사로 을사늑약을 주도했다.

1906년 일본 제국주가 대한제국에 설치한  조선 통감부 제1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고종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였고, 군대해산을 주도하기도 했다. 1909년 6월 조선 총독(통감)을 사임하고 일본 왕의 자문기관인 추밀원 의장으로 물러났으나, 이등박문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1909년 10월 26일까지 대한제국(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강제병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중국 상하이로 갔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하고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였다가, 일제의 고종황제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 체결,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목도하고 의병활동을 하며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의병부대 창설과 비밀결사조직 단지동맹을 만들었다.

 

 

일제는 1909년 7월 6일에 이미 대한제국을 완전 식민지화하는 강제 병탄을 의결하여 일왕의 재가를 받아놓았고, 이등방문의 하얼빈 방문은 러시아와 청나라(중국)의 양해를 받고 몽골에 대한 지배권도 러시아와 협상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향해 3발을 명중시켜 저격하였다. 대한남아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떨친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무신(戊申, 1908)년 증산 상제님께서는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저격 천지공사를 보실 때도 동음(同音)을 취해서 공사를 보셨다.

또, 증산도 『도전道典』 5편 365장에는 기유(己酉, 1909)년 봄에 상제님께서 직접 조선 통감부를 가시어 이등박문을 만나 천지공사를 보신 내용도 있다.

 

 

 

 

 

 

 

 

 

 

일등방문(一等方文)과 이등박문(伊藤博文, 이등방문二等方文)

 

이 공사는 세운(世運, 세상이 흘러가는 역사 판도)으로는 민족의 원흉을 척살하는 의미도 있지만. 도운(道運, 증산도가 흘러가는 역사 판도) 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공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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