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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명언

by 도생(道生) 2016. 3. 12.

사상 최대의 작전 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명언

 

 

 

 

 

 

 

 

전쟁은 인류 문명이 만들어 낸 비극이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연합군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마지막 총력전을 벌인다.

 

그 시작은 사상 최대의 작전으로 남아 있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의 진두지휘 아래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오마하 비치 해안에서 펼쳐진 작전명 오버로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사상 최대의 작전이며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의 기세를 꺾고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 상륙작전이었던 만큼상징성으로 그동안 영화, 소설 등의 소재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독일군은 노르망디보다 더 북쪽에 있는 파드칼레 해안으로 연합군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연합군이 집결한 영국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프랑스 파드칼레 해안으로 상륙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린 연합군의 기만전술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 아래 8개국이 참여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원래 6월 5일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하루 늦은 6월 6일에 감행되었다. 

 

유럽의 서부전선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6월 6일에 감행되었고, 유럽의 동부전선에서 독일군과 대치 중이던 소련군은 6월 22일에 독일군에 대규모 공격을 시작한다.

벨라루스 공세(바그라티온 작전)로 독일군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극대화 시켰다.

 

 

 

 

 

 

 

 

 

 

 

전쟁 전문가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항복하는 데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던 것은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있지만, 모든 면에서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 영향이 더 컸다고 한다.

 

실제 1941년 6월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하며 만들어진 동부전선에 1942년 260개의 독일군 최정예 사단이 배치되었고, 연합군과 독일군이 대치하던 서부전선에는 그보다 전투력이 약한 59개의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동부전선은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의 소련 침략으로 시작하여 1945년 5월 9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4년간 전쟁을 마치게 된다. 동부전선을 독소전쟁, 대조국전쟁이라고도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사상자와 포로 등 피해의 대부분이 소련과의 동부전선에서 나왔고 소련도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2차 세계대전 사상자가 최대 약 5천 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중 약 3천 만 명의 사상자가 동부전선에서 나왔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승전국과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치열했고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독일과 소련의 전쟁은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홍보 효과에 묻혀 버렸다.

 

동서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사상 최대의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2차 세계대전을 종식하는데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1890년 미국 텍사스 데니슨에서 태어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다.

 

아이젠하워는 한때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참모도 했었다. 그는 평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남보다 진급도 더뎠다. 중령 계급을 20년간이나 달았을 정도로 드러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 대신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아이젠하워를 1943년 2차 세계대전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지상군 총사령관은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맡았고 아이젠하워 장군이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아이젠하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육군참모총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퇴역한다.

1948년 퇴역하여 컬럼비아 대학의 총장을 하다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현역으로 다시 복귀하며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NATO)에 오른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한국에 극비에 방문하였다.

 

1953년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전쟁을 종식하지는 못했지만, 휴전협정을 이끌어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1960년 대한민국을 방문하였다.

미국 대통령에 재선한 아이젠하워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196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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