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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6·25 한국전쟁 - 미국 참전

by 도생 2016. 8. 21.

나지 않은 전쟁 6·25 한국전쟁- 미국 참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자본주의(민주주의)와 공산주의(사회주의)가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던 동서냉전 시대 초기에 냉전의 상징 국가였던 유럽의 독일이 아니라 아시아의 한반도에서 한 판 전쟁이 붙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은 유사 이래 가장 작은 땅덩어리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참전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해방을 맞은 지 불과 5년 만에 일어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한반도는 초토화됐으며, 승자도 패자도 없이 휴전(休戰, 전쟁을 잠시 쉬는) 협정을 맺고 대치 중인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승전국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3·8선을 중심으로 남한과 북한을 분할 점령하였다.

 

 

1945년 9월 8일 미국의 하지 중장이 이끄는 제24군단이 인천으로 상륙하여 남한을 점령하여 군정(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을 실시한다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하였. 그리고 9월 12일 아치볼드 아놀드 소장이 미 군정 장관으로 임명되며 정식 군정시대를 맞이한다. 

 

 

한반도를 양분하여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한은 민주주의(자본주의)로 북한은 사회주의(공산주의)로 이념이 갈렸다.

1948년 8월 15일이 남한의 단독정부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미 군정은 대한민국 정부에 정권을 이양하고 1949년 6월에 철수한다.

 

 

 

 

 

 

 

 

 

 

 

 

미국은 북한이 남침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전쟁을 예견하고 있었으나 무시했다.

더욱이 1950년 1월 12일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은 대한민국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이른바 애치슨라인 발표는 6·25 한국전쟁 발발의 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은 한반도 삼천리금수강산을 갈기갈기 찢겨 전 국토가 황폐해졌다.

한국전쟁의 참혹한 상황은 모두에게 뼈아픈 상처와 고통을 남겼다. 

 

 

 

1950년 6월 25일 선제공격을 감행하며 남진한 북한군 불과 3일 만에 남한의 수도 서울을 점령한다.

국가를 믿고 대통령을 믿었던 국민은 한강 인도교와 한강철교를 폭파하는 바람에 피난도 못 가고 속수무책으로 북한군의 포로가 된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즉각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상임과 비상임이사국 11개 회원국 중 2개 회원국의 기권과 9개 회원국의 찬성으로 안보리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다시 유엔의 군사 지원을 촉구하는 83호, 유엔군 파병의 84호를 통과시키며 한국전쟁에 참전을 결정한다.

 

 

1950년 7월 7일 유엔군이 창설되고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사령관이며 일본 주둔 미국 극동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이 되어 7월 18일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작전 지휘권을 받는다.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은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터키,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캐나다, 콜롬비아, 필리핀, 타이,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6개 나라다.

 

 

 

 

 

 

 

 

 

 

 

 

8월 중순 한반도의 90%를 점령한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전투가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이 이끄는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적을 감행하여 적을 허리를 잘라놓았다.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계속한다.

 

 

 

북진을 계속하던 유엔군38선을 넘어가자 모택동은 중국군(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명령한다. 

 

중국군은 만주에 약 30만 대군, 압록강 변에 약 15만 대군이 대기하고 있다가 유엔군이 중국의 턱밑까지 오자 1950년 10월 25일 전쟁에 개입하며 인해전술 남진한다. 전쟁기간에 투입된 중국군의 숫자는 약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을 빼앗겼다가 다시 탈환하며 일진일퇴하다 현재의 휴전선 인근으로 전선은 굳어지고, 1951년 6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2년여를 끌다가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정전(停戰, 전쟁을 잠시 멈춘) 협정을 한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전쟁을 하다 정전협정(휴전협정)을 맺으면서 기나긴 휴식에 들어간다.

 

 

6·25 한국전쟁은 유엔군(국제 연합)이 참전한 최초의 전쟁이며, 자본주의(민주주의)와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들이 갈려서 맞붙은 최초의 전쟁이다.

 

 

 

 

 

 

 

 

 

 

 

 

6·25 한국전쟁에 참여한 나라는 파병 16개국, 물자지원 40개국, 의무지원 5개국, 전후 복구 6개국으로 총 67개국에 이른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가 단일 연합군(유엔)으로 참전하여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유엔과 전쟁을 한 나라는 북한, 중국, 소련 3개국이다.

 

 

동북아시아의 작은 한반도 땅덩어리에서 벌어진 전쟁은 가히 제3차 세계대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가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6·25 한국전쟁의 최대 수혜국은 단연 미국과 일본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던 일본 경제에 활로를 열어주었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한국전쟁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민주주의(자본주의)와 공산주의(사회주의)와의 한 판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막대한 희생만 치른 채 휴전 66년이 지나고 있다.

6·25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며 북한의 핵무기로 촉발된 긴장으로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다.

 

 

민족상잔의 6·25 한국전쟁은 한민족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크나큰 상처와 비극을 남겨 놓았고, 대한민국을 지원한 유엔군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한반도는 휴전(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협정을 맺고 대한민국과 북한이 63년째 서로 대치 중이다.

지금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세계 최고의 군사대국, 경제 대국인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등 4대 강국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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