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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임진왜란 3대 대첩 (이치대첩)권율장군 행주대첩

by 도생(道生) 2016. 11. 17.

임진왜란 3대 대첩 - 이치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첫 번째는 1592(선조 25) 8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이고,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이 진두지휘하여 승리한 1592년 10월의 1차 진주성 전투가 진주대첩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1593년(선조 26) 2월 권율 장군이 지휘한 행주대첩이다.

 

 

그러나 한산도대첩과 진주대첩의 승리가 있기 전 1592년(선조 25) 7월에 권율 장군은 충청도 금산(전라도 완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른바 이치 대첩(梨峙大捷)으로 불리는 승리였다.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한산도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큰 승리였다.

이치는 충청도 금산군과 전라도 완주군의 경계 대둔산에 있는 고개이름이다.

이치(梨峙)는 말 그대로 배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미 한양 도성을 점령한 일본군이 남하하여 전라도로 진격한다.

충청도에서 전라도 곡창지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치를 통과해야 했다.

이치고개는 350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가파른 경사와 주변에 산이 막혀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다.

 

 

 

 

1592년(선조 25) 7월 8일 전라도 곡창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던 육상 왜군이 처음으로 대패한 곳이 이치 전투다. 전라도 나주(광주) 목사 권율 장군은 왜군이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격문을 띄워 병사와 의병을 집결하였다.

 

권율 장군이 총 지휘한 이치 대첩을 이치 대첩과 웅치 대첩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7월 8일 이치고개와 웅치고개에서 왜군과 맞붙은 전투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하나의 전투로 본다.

 

 

 

 

 

 

 

 

 

 

 

 

 

 

웅치고개는 전라도 진안군에서 전라도 완주(전주)로 넘어오는 곳에 있는 고개다.

김제 군수 정담, 해남현감 변응정, 나주판관 이복남과 황박 등이 이끄는 의병은 웅치(雄峙)고개에서 왜군을 전투가 벌어졌다.

 

 

 

웅치전투에서 조선 관군과 의병 등 3천여 명이 1만 명에 육박하는 왜군과 맞붙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항전하였지만, 끝내 패전한다. 그러나 웅치전투에서 왜군의 주력군 등 전력에 큰 손실을 보아 전주 안덕원까지 왔다가 철수하고 만다.

 

혹자는 웅치전투에 조선군 숫자가 1천여 명, 왜군 숫자가 2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웅치고개에서 실질적으로 패전한 왜군은 철수하면서 조선 군사와 의병의 시체를 묻어주고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 조선에 충성스럽고 의로운 행위를 한 영혼에 조의를 표한다.)의 표목(푯말)을 남기고 떠난다.

 

권율 장군은 전라도 화순의 동복 현감 황진 장군의 휘하 부대와 의병을 포함하여 1천5백여 명이 왜군의 1만 대군을 물리쳤다. 용장(勇將) 황진 장군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다.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전라도 곡창지대 호남평야로 진출하려던 왜군을 물리친 전투가 이치 대첩이다.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은 사위 이항복에게 보낸 편지에 '임진왜란 중 자신이 치른 여러 전투중에서 이치 대첩이 최고이며 행주대첩은 그다음'라 말했을 정도다.  

 

 

 

 

임진왜란 3대 대첩에 버금가는 이치 대첩을 승리로 이끈 나주(광주) 목사 권율 장군은 이치 대첩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1592년 7월 22일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된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1592년)

 

왜장(倭將)이 또 대군을 출동시켜 이치(梨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독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비 위대기, 공시억 등과 함께 재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며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며 계속 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컫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1593년(선조 26) 1월 조명연합군, 의병과 승병이 함께 평양성을 탈환한다.  

이치 대첩으로 전라도 관찰사가 된 권율 장군은 한양 수복을 위해 행주산성에 2,300여 명의 관군과 의병, 승병과 일반백성까지 9천 명에 육박하는 민관군이 모두 집결하였다.

 

 

1593년(선조 26) 2월 12일 3만여 명의 왜군이 행주산성을 공격한다.

전투할 수 있는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조선은 부녀자들이 치마 위에 짧은 치마를 둘러 돌을 날라와 투석전까지 펼치며 싸운 끝에 승리하였다. 3만여 명의 왜군은 9차례의 끈질긴 공격을 했으나 2만 4천 명이 죽거나 다쳐서 후퇴하고 만다.

반면, 조선군 사상자는 13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전라도 관찰사 권율장군은 임진왜란 3대 대첩 행주대첩의 공로로 도원수(都元帥)를 제수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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