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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3대 대첩 이순신 장군 한산도대첩

by 도생(道生) 2016. 11. 15.

임진왜란 3대 대첩 - 충무공 이순신 장군 한산도대첩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7백 척의 왜선에 약 2만 명에 육박하는 왜군이 침략해 들어왔다.

4월 21일 대구성 함락, 4월 26일 상주 함락, 4월 27일 문경새재를 넘어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장군이 무너졌다.

왜군은 조선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여 승승장구하며 1592년 5월 3일 한양도성에 들어왔다.

 

 

 

임진왜란 초기 이후 육상의 조선 군대는 부산진성, 동래성을 빼앗기며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조선 왕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맹장(猛將) 신립장군을 삼도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왜군을 물리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믿었던 신립장군마저 왜군에 패하고 자살하고 만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전라좌수사(정 3품)로 현재의 여수에 부임해 있었다.

연전연패의 육상과 달리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물리치며 승전을 계속했고, 이순신 장군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남해안은 난공불락의 요새, 철옹성과 같았다.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기록되어 있는 한산도대첩이 이순신 장군의 첫 승리가 아니다.

한산도대첩 이전에도 이순신 장군은 일본 수군과 7차례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불패의 신화를 만든 이순신 장군은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낮, 왜선 20여 척 격침)과 합포해전(오후, 왜선 5척 격침), 5월 8일 적진포해전(왜선 11척 격침), 5월 9일 사천해전(왜선 13척 격침), 6월 2일 당포해전(왜선 21척 격침), 6월 5 당항포해전(왜선 26척 격침), 6월 7일 율포해전(왜선 3척 격침)에서 승리하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1592년(선조 25) 7월 8일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의 수군과 합세하였다.

거북선과 판옥선 등 55여 척으로 왜선 73척 중 59척을 격침 또는 나포하였고, 왜군 7~9천 명이 사상자가 나왔으며 불과 10여 척만이 도망갔다.

 

 

 

임진왜란 3대 대첩 한산도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鶴翼陳)이란 탁월한 전술로 일본 수군을 물리쳤다.

한산도대첩의 학익진은 처음에는 일렬횡대의 일자진(一字陳) 형태를 취하다가 적선이 공격해 들어오면 중앙부대가 뒤로 물러나면서 학이 날개를 펼친듯한 반원형의 진법을 취하여 적선을 집중 공격하는 진법이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는 것은 당시 전쟁에서 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왜군은 임진왜란에서 수륙병진(水陸竝進)전략으로 육상과 해상으로 동시에 공격해 들어가는 전략을 쓰고 있었다.

 

육상에서는 조총을 앞세운 왜군이 승승장구했지만, 일본 수군이 해로를 이용하여 병력과 군량미를 지원하는 전략은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닷길이 봉쇄되어 꼼짝할 수 없었다.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7차례 해상전투에서 패배하고 절치부심하고 있던 일본 주력 수군을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조선 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하여 일본의 임진왜란 전략, 즉 수륙병진(水陸竝進)에 큰 차질을 불러온 것과 연전연패한 조선 관군에게 일본 수군의 주력군을 쳐부숨으로써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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