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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임진왜란 3대 대첩 김시민 장군 진주대첩

by 도생(道生) 2016. 11. 16.

임진왜란 3대 대첩 - 진주(晋州) 목사(牧使) 김시민 장군 진주대첩 - 1차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 당시 조선 팔도 관찰사가 있고, 팔도 20곳에 20명의 목사(牧使)가 있었다.

목사는 무관직으로 정3품의 벼슬이다. 경상도는 상주, 진주, 성주 3곳에 3명의 목사가 다스리고 있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진주대첩을 이끈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 1591년(선조 24)에 종5품 진주 판관(晋州判官)으로 부임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육상에서 연전연승하며 파죽지세로 북진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군량미를 싣고 남해와 서해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일본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에 막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임금과 조정 신료들이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육상의 조선 관군은 연전연패하였다. 

선조와 국정을 운영하던 사대부 선비출신 쟁쟁한 대소신료들은 자기 한목숨 살자고 도망가기에 급급할 때 백성은 의병(義兵)이란 이름으로 각지에서 봉기하여 왜군을 격파하였다.

 

 

1592년 7월 6일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첫 번째 대첩인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전라도 곡창지대는 왜군이 전쟁을 치르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곳이었다.

경상도 진주성은 왜군이 곡창지대 전라도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점령해야 할 성이면서 전략적인 교두보였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진주대첩의 영웅 김시민 장군은 선조의 명으로 백성을 모아 안정시키는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받은 김성일의 추천으로 진주 목사가 된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는 당시 진주 목사 이경, 진주판관 김시민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이 선조에게 전투 상황을 보고한 내용 中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8일(1592년)

 

"신은 진주에 머물면서 독려 조치하여 이 고을을 견고하게 지키도록 하여 호남 및 내지를 방어하는 계책을 삼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진주) 목사 이경이 목에 종기가 난 지 1개월이 지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순찰사는 그가 실제로 아픈 줄을 모르고서 이미 주청하여 그를 파직시켰으므로 다만 판관 1명 만이 있을 뿐이어서 성을 지킬 장수가 없습니다."

 

 

 

선조실록 28권, 선조 25년 7월 26일(1592년)

 

"진주 판관 김시민의 사공(事功)은 전후의 장계에 의하면 매우 뛰어납니다. 급히 벼슬을 올려 격려함으로써 권장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김시민을 진주 목사에 제수하였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진주대첩은 1592년(선조 25)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벌어진 전투다.

1592년(선조 25) 10월 4일 3만여 명의 왜군은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진주성 내에서는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과 관군이 진주성 외곽에서는 홍의장군 곽재우, 최경희 등 경상도와 전라도 의병이 진주성을 공격하는 왜군을 교란시키며 협공했다.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은 3천 8백여 명의 관군과 성내 백성이 힘을 합쳐 8배가 넘는 왜군을 필사적으로 물리쳤다. 

1차 진주선 전투,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최초로 승리한 수성(守城) 전투이며, 조선의 정규군과 비정규군인 의병, 즉 민관군이 하나로 일치 단합하여 왜군을 물리친 전투였다.

 

 

진주대첩의 영웅 김시민 장군은 1차 진주성 전투 막바지였던 10월 9일 숨어 있던 왜군의 유탄에 맞고, 10월 18일 39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에 크게 분노했고, 1593년 6월에 2차 진주성 전투 때는 10만 여명의 왜군이 총공격하여 진주성 내 약 7만 명의 조선인이 몰살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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