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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남명 조식과 의병장 곽재우 정인홍 김면

by 도생(道生) 2016. 11. 19.

칼 찬 선비(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과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들

임진왜란 경상도 3대 의병장 - 의령의 의병장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

합천의 의병장 내암 정인홍 장군, 고령의 의병장 송암 김면 장군

 

 

 

 

 

 

 

 

 

 

 

 

 

 

 

창녕 조씨 남명 조식(南明 曺植, 1501~1572, 연산군 7년~선조 5년) 선생은 조선 중기 대학자다.

조선 성리학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 선생의 이름 앞에는 칼 찬 선비, 대쪽 같은 선비, 실천 지식인, 조선의 참 선비 등 숱한 수식어가 붙는다.

 

당시 조선 성리학에서 남명 조식 선생은 경상우도의 영수였으며, 퇴계 이황은 경상좌도의 영수로 두 사람은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3대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과 이노, 전치원, 하락, 조종도, 박성무, 이대기 등을 비롯하여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50여 명이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남명 조식 선생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남명 조식 선생은 1540년(중종 35)에 회재 이언적 선생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됐으나 거절하였고, 남명 조식과 함께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이 명종에게 천거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552년(명종 7), 1553년(명종 8)에 전생서 주부, 사도시 주부, 예빈시 주부를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1555년(명종 10)에 단성현감으로 제수되자 목숨을 내놓고 단성현감을 그만둔다는 사직상소를 올린다.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서 왕(명종)의 실정과 부도덕한 문정왕후의 권력 전횡무섭게 비판했다.

 

1568년(선조 1) 새로운 정치를 해보려던 선조는 남명 조식을 불렀으나 끝내 벼슬을 사양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 여파로 남명학파가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남명 조식 선생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 전인 1572년(선조 5)에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곽재우, 정인호, 김면 등 조식 선생의 남명학파 제자들은 앞다투어 임진왜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50여 명이 넘는 제자들이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은 남명 조식 선생의 학문이 단순히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니고 학문을 통해 자신을 수양하고, 현실에 적용한 실천적인 대학자였기 때문이다.

 

 

 

 

남명 조식 선생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과 지리, 산술 등을 비롯하여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병법도 가르쳤다. 당시 성리학이 이론적 학문 치중했지만, 남명 조식 선생은 실천적인 면에 주력함으로써 임진왜란에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남명학파 50여 명의 제자가 의병장으로 나서 왜군을 물리쳤다. 

 

 

 

 

 

 

 

 

 

 

 

 

 

 

칼 찬 유학자, 조선의 참 선비 남명 조식 선생은 경(敬)과 의(義)를 자신의 학문과 처신의 지표로 삼았다. 

 

경(敬)과 의(義) 사상은 『주역』에 나온다.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즉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

바르고 곧은 마음 경(敬)사상과 정의를 세우는 의(義)사상은 남명 조식 선생의 학문의 중심이었다.

 

 

 

남명 조식 선생은 허리춤에 성성자(惺惺子)와 경의검(敬義劍)를 차고 다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리를 내는 성성자는 남명 조식 선생이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했다.

 

성성자와 함께 차고 다닌 경의검(敬義劍)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즉 안으로는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이고, 바깥으로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이 의'라는 글귀를 새겨넣고 다녔다.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 곽재우, 정인홍, 김면 의병장 등 수십 명이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선봉에 서서 맹활약하였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한 약포 정탁도 남명 조식이 있는 곳에 부임하자 스승의 예를 올리고 공부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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