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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군함도 강제징용 생지옥 하시마섬 탄광

by 도생(道生) 2017. 7. 1.

군함도(軍艦島) 강제징용(강제노역): 조선인에게 생지옥과 같았던 하시마섬 탄광

 

 

 

 

 

 

 

 

 

 

 

 

 

 

우리나라 석탄산업은 19세기 말 일본인에 의해 탄전(炭田)이 조사되었고,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문경 탄광(남한)이 채굴을 시작했다.

 

탄광산업의 전성기라고 하는 1960~70년대 흔히 탄광을 '막장'이라고 불렀다.

부라는 직업이 그만큼 위험하고 힘들었다는 의미였다. 수십 년 전 사용하던 막장이라는 의미는 아직도 부정적 또는 극단적 의미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으로 강제징용 당하여 끌려간 한국인 피해자들은 하시마섬 탄광을 생지옥과 같은 지옥섬이라고 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19세기 말부터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식민지와 점령지 국민을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전쟁에 강제동원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집단감금 상태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노예처럼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고, 때로는 병들거나 죽어 갔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는 약 780만 명의 한국인을 강제징용과 강제징집으로 전쟁터와 강제노역 현장에 끌고 갔다.

 

 

 

 

 

 

 

 

 

 

 

 

침략전쟁에 광분한 일본은 식민지와 점령지의 인적자원을 수탈하여 태평양전쟁에 총력전을 펼친다.

처음에는 모집 형식에서 관알선(각 지역 할당 목표 강제연행), 강제징용으로 군수기지 건설과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조선소, 탄광, 광산 등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끌려간 한국인은 이른바 군함도라 불리는 생지옥의 하시마섬 탄광을 비롯하여 1만여 곳이 넘는 지역으로 약 7백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한반도, 일본, 중국과 만주, 사할린,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서태평양과 남태평양의 섬 등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전후방(前後方)을 가리지 않고 한국인이 '일본군', '군무원', '강제노역', '학도병', '위안부' 등으로 끌려갔다. 

 

 

 

 

 

 

 

 

 

 

 

 

나가사키에서 약 18km가량 떨어진 하시마섬(끝섬端島)은  주변에 급류가 거센 아주 작은 무인도였다.

1810년 하시마섬(군함도)의 노천 석탄이 발견되고, 1871년부터 본격적으로 석탄이 채굴되었다.

하시마섬(군함도) 옆에 있는 다카시마 탄광은 1869년 서양 기술자를 고용하여 이미 석탄을 채굴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 석탄, 철강 등 핵심산업을 기반으로 근대화를 이루었다.

일본 근대화의 한 축이 석탄산업이고, 근대화의 상징이다.

그러나 강제징용으로 군함도 탄광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린 한국인에게 하시마섬 탄광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타가시마 탄광이 일본 최초의 해저 탄광과 최대의 해저 탄광이었다면, 하시마섬(군함도) 탄광은 생지옥과 같은 최악의 탄광이다.

1887년 제1 해저 수갱을 굴착하고, 1890년 미쓰비시가 군함도 탄광을 인수하면서 석탄 채굴량을 늘려나갔다.

 

하시마섬(군함도)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와 가족들은 물 부족에 시달렸다.

1891년 미쓰비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증류기를 설치하여 물 공급을 늘려간다.

군함도에서 가장 큰 문제가 물 부족 현상이었다. 그래서 미쓰비시는 이후로도 증류기를 추가로 설치한다.  

 

 

 

 

 

 

 

 

 

 

 

 

 

1893년에는 제2 해저 수갱을 굴착하고, 하시마섬 탄광의 소유주 미쓰비시가 심상소학교(초등학교)를 설립한다.

1907년에는 다카시마섬(고도高島)와 하시마섬(단도端島) 간에 해저 전선을 개통한다.

 

  

일본은 아주 작은 하시마섬(군함도)을 1897년부터 1931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길이 320m,  120m에서 길이 480m, 120m 매립했다.

 

 

하시마섬이 매립과 확장이 진행되면서 하시마섬 주위를 빙 둘러 약 10m 내외의 콘크리트 방파제를 만들어 높은 파도 막고 석탄운반선 부두를 조성해 나갔다.

 

 

 

 

 

 

 

 

 

 

 

 

 

 

미쓰비시는 환경이 열악한 하시마섬 탄광(군함도)에 광부를 끌어들이고자, 당시 최첨단 기술자와 공법을 동원하여 1916년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현대식 아파트를 건립한다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구조물 아파트는 4층 건물로 지었으나 7층, 9층, 10층으로 신축하거나 증축했다.

군함도(하시마섬)에 극장, 신사, 유치원, 기숙사, 중학교, 수영장, 체육관, 병원과 파칭코와 이·미용실 등 여러 편의시설 등 70여 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1917년 권양기와 증기로 전기를 만들어 사용하던 군함도 탄광은 해저 케이블로 송전받는다.

증류기와 제염공장의 증류수 등을 식수로 사용하던 군함도는 석탄 채굴량이 늘리기 위해 하시마 탄광에서 일할 광부를 수시로 모집했다. 사람이 많아지면서 물 부족 현상이 심화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32년 군함도에 물을 공급하는 전용 급수선을 만들었다.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 끝섬(端島, 하시마섬)이 군함도(軍艦島, 군칸지마)라고 불리게 된 유래를 살펴보면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화하는 과정과 함께 군국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16년 일본 아사히 신문은 하시마 섬(군함도)의 높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이 멀리서 보면 마치 군함과 비슷하다고 기사를 내보낸다.

 

 

 

 

1921년 다카시마섬 탄광과 하시마섬 탄광의 소유주이며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전함 도사(토좌佐)를 건조했다. 당시 나가사키의 일일신문은 일본 전함 '도사'와 하시마섬이 닮았다고 기사를 내보내면서 하시마섬을 군함도(軍艦島, 군칸지마)로 소개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하시마섬을 군함도라고 부르게 된다.

 

 

최신예 일본 전함 '도사'는 1922년 미국, 영국,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가 참가한 군축회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폐선될 처지에 몰리자 당시 '도사'에 설치되어 있던 16인치 함포를 떼어내어 부산과 대마도에 설치했다.

 

미군 폭격기가 컴컴한 밤에 바다 위의 군함도가 일본 전함인 줄 알고 폭격을 했다는 말도 전한다.

 

 

 

 

 

 

 

 

 

 

 

 

 

 

1935년 제염공장을 폐쇄하고, 1936년 군함도에 하시마 신사를 만든다.

군함도 하시마 탄광은 1941년 연간 석탄 생산량 41만여 톤의 최고 기록을 달성한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강제징용이 본격화된 것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 1939년 국민징용령, 1941년 노무조정령 등이 시행되면서부터다.

 

 

일본이 패망하던 1945년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서 석탄을 싣던 운반선이 어뢰를 맞고 침몰하고 미군의 폭격으로 갱도가 수몰되기도 했다.

 

 

 

 

 

 

 

 

 

 

 

 

1956년과 1959년에 태풍의 영향으로 군함도도 큰 피해를 보았으며, 1973년에는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1974년 1월 15일 마침내 군함도의 하시마 탄광이 폐광된다.

1974년 4월 20일 군함도(하시마섬) 거주 일본인이 모두 떠나고 무인도가 되었다.

 

 

군함도 하시마 탄광의 소유주이며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 기업 미쓰비시가 군함도(하시마섬)를 다카시마에 기증한다.

2009년 일본 근대화 상징의 산업 시설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준비했고, 군함도(하시마섬)도 포함되면서 일반 관광객이 드나들었다.

 

2015년 군함도를 비롯한 23개 시설이 일본 근대화를 상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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