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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군함도(하시마섬 탄광) 강제징용 피해자

by 도생(道生) 2017. 7. 2.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하시마 섬 탄광)와 한국인 강제징용(강제노역) 피해자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나라다.

혹자는 일본 근대화와 산업화가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인을 강제징용으로 끌고 가 이루었다고 주장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강제징용을 본격화한 1939년 말 이전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미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었다.

일본은 지난 2015년 지옥섬으로 불린 군함도(하시마 탄광)를 비롯한 23개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성공했다.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군함도(하시마 탄광)를 비롯한 23곳 중 7개 시설이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시설이라 세계문화유산 등재 보류 또는 일본의 강제징용 사실을 명기하라고 일본에 요구하였다.

 

 

약삭빠른 일본은 대한제국 강제병합이 일어나기 전인 일본이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메이지 시기 1860년에서 1910년으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한국인 강제징용(강제동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시마섬 탄광은 1974년 이미 폐광되어 출입할 수도 없으므로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없고,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것은 군함도에 있는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구조물 아파트다.

 

그런데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 있는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아파트는 1916년에 건립했다고 이미 100년 전부터 공식적으로 공개돼 있다. 일본이 똑똑한 것 같지만, 잔머리를 굴렸다는 것과 대한민국이 얼마나 안일하게 대처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시설들은 어찌 됐든 건립과 사용 연도를 떠나서 일본이 주장한 대로 근대화의 상징임은 틀림없다.

일본의 세계문화유산을 다른 말로 하면 침략전쟁에 미쳐 날뛴 군국주의의 상징이다.

 

 

20세기 초에서 중반에 이르는 시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피해를 본 나라와 피해당사자 측면에서 볼 때 일본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행위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 등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시설 상당수가 침략전쟁의 상징이며, 인적수탈과 인권 유린 등의 만행을 저지른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반성과 사과는 없었고, 심지어는 강제징용의 사실까지도 부정하고 왜곡하며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미명아래 파렴치한 행위를 서슴없이 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병 되어 일본군으로 끌려간 한국인과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 남녀노소의 정확한 통계는 없다.

지난 70여 년 동안 일본 정부는 일제강점기 저지른 만행을 관되게 부정하고 있고, 대한민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일제강점기 강제병과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만이 진실 규명과 법정 투쟁을 하며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고 나서 거짓선전을 하기 시작한다.

 

1940년과 1942년 오사카 아사히 신문은 조선인 광부를 특별우대했고, 또 돈벌이와 대우가 좋아 자발적 희망자가 넘쳐나고 기뻐했다는 기사를 내보낸다.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으로 탄광에서 강제징용으로 일한 사람은 14세 이상의 남성만 광부로 일하였으나 나중에는 여성까지도 탄광에 강제동원했다.

 

 

 

 

 

 

 

 

 

 

 

 

세계문화유산을 등재된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 한국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일반적으로 1940년대 초반부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서 일한 증언자의 말에 의하면 1938년 국가총동원법과 1941년 국민징용령이 시행되기 이전에도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 한국인이 광부가 일하고 있었다고 하며,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기 이전인 중일전쟁 전후부터 강제징용으로 군함도에 끌려와 하시마 탄광에서 일한 한국인도 많았다고 증언했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서 한국인 강제징용이 가장 많았던 때의 인원은 최소 5백 명에서 최대 1천 명까지로 추정하고 있고, 1943년에서 45년에는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전체 광부의 30%를 웃돌았다고 한다.

 

일본에 의해 사할린 등지로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다시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으로 전환 배치된 '이중징용' 피해자도 상당수 있었다.

 

 

 

 

 

 

 

 

 

 

 

 

30년 전 일본에서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1925년부터 1945년까지 군함도에서 사망한 사람은 일본인을 포함하여 총 1,295명이라고 나와 있다.(전체 사망자인지 일부 사망자를 기록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강제징용으로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 끌려온 한국인 사망자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남자 110명, 여자 12명 총 122명이 사망했고, 중국인, 사망자는 15명이다. 강제징용 사망자의 사망원인은 군함도(하시마섬 탄광) 해저 탄광이라 육상 탄광보다 열악한 환경의 석탄 채굴과정에서 질식과 압사, 폭상사 등이 많았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치 고문이라도 하듯 가혹한 폭행에 맞아 죽은 폭행사와 병사, 자살, 그리고 급류가 쌔서 탈출 자체가 불가능한 군함도를 탈출하다가 익사한 사람도 적지 않다고 했다.

 

 

 

 

 

 

 

 

 

 

 

 

일본인과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과 중국인의 거주지는 사뭇 달랐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 소장과 간부, 일본인 광부들의 집은 좋은 목조주택과 전망 좋은 아파트 고층 및 중층에서 거주했다.

 

그러나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빛도 들어오지 않고 습도가 높고 악취가 가득한 아파트 최하층이었다.

모기와 벼룩이 들끓어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일본인들은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과 중국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냥 개, 돼지와 같은 짐승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폭동을 염려한 일본은 군함도에 있던 한국인과 중국인을 섬의 남단과 북단에 분리 수용했으며, 작업 현장과 시간도 겹치지 않도록 했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서 일본인은 관리 감독과 편한 곳에서 일했고, 강제징용 당한 한국인과 중국인은 최악의 조건에서 일했다.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좁은 갱도에서 웅크린 채 석탄을 채굴했고, 안전장비 하나 없는 갱도에서 평균 40~45도, 최고 60도에 이르는 더위를 참아가며 일했다.

   

 

 

 

 

 

 

 

 

 

 

 

무엇보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물이었다.

수천 명이 공동생활을 하는 군함도는 물을 실어 나르는 운반선과 증류수로 마실 물, 세탁과 목욕 등을 모두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귀한 것이 식료품, 즉 먹을 것이었다.

 

 

비 오듯 땀이 쏟아지는 갱도에서 물 한 모음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멸시와 폭력을 참아가며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하루 세 끼를 먹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조차 없었다.

 

일본인에게 물과 식료품은 넘쳐났지만,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과 중국인에게는 단지 그림의 떡이었다.

 

 

 

하루에 멀건 국물에 주먹밥 1개가 먹는 것이 전부인 채로 허기진 배를 달래가며 가스와 석탄 먼지는 그대로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해저 갱도에서 마실 물이 없어 갱도의 오염된 물로 목을 축였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가운데 다치고 병들고, 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이 다반사였다. 군함도(하시마섬)에 병원이 있었지만, 전쟁 중이던 일본은 후방에 온전한 병원시설과 의료인력을 배치하지 않았고, 한국인과 중국인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이중징용으로 다른 곳에서 석탄 채굴을 하다가 온 한국인은 그나마 채굴 경험이 있었지만, 열악한 해저 탄광은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석탄 채굴 경험이 없던 사람에게 군함도는 최악의 조건이 아니라 공포 그 자체였다.

 

 

극한의 노동과 폭행과 멸시, 배고픔 때문에 성인도 견디기 힘들어 자살하고 하시마섬(군함도)을 탈출하다 급류에 휘말려 죽은 사람도 있는데, 그곳에 15살 어린 나이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생사를 넘나드는 생지옥 같은 곳에서 목숨을 이어가다 살아온 강제징용 피해자도다.

 

 

 

 

 

 

 

 

 

 

 

미쓰비시가 약속한 월급은 말뿐이었다.

밥값, 숙소사용료, 각종 세금과 작업 도구 대여료, 옷값 등을 제외하면 10분의 1도 되지 않았고, 그나마 남은 돈도 저축이라는 명분으로 강제로 일본 정부 채권을 구매해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숨쉬기도 어려운 최악의 환경에서 하루 8시간 3교대인데 16시간 동안 일해야 했고, 하루 12시간 맞교대에 오가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15시간을 중노동을 하는 가운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고문과 다를 바 없는 잦은 폭행에 시달렸다.

 

 

 

1974년 지옥섬 군함도의 하시마 탄광이 폐광되면서 무인도가 되었고, 40여 년간 버려졌던 군함도는 나가사키시는 2009년부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리스트에 선정되면서 일반인 관광을 허용했다.

 

CNN은 2012년 아무도 살지 않고 을씨년스러운 지옥섬 군함도를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7곳 중 한 곳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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