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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일본 최초의 지상전투, 오키나와 전투(상륙작전)

by 도생(道生) 2017. 7. 15.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미국과 일본의 최초의 지상전투, 오키나와 전투(상륙작전)

 

 

 

 

 

 

 

 

 

 

 

 

 

오키나와(류큐 왕국, 오키나와 본섬을 비롯한 140개 섬)는 수백 년 동안 조선, 일본, 중국 등과 교류를 한 독립국의 섬나라였다가 메이지유신(명치유신) 이후 일본에 강제 병합됐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일본과의 전쟁과 일본 영토 문제에 대한 카이로 선언을 발표한다. 루즈벨트는 장제스 총통에게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중국이 원한다면 류큐(오키나와를 비롯한 140개 섬)를 주겠다고 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오키나와는 미국이 점령한 식민지 아닌 식민자가 되었다.

미국의 점령 아래 있던 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로,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된 오키나와(유구 열도)는 100여 년 전 류큐 왕국의 독립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편입되는 아픔을 가진 섬이다.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본섬에 미국(연합국)이 상륙작전을 시작으로 6월 23일까지 일본과 미국(연합국)의 80여 일간의 전투를 말한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미국과 일본, 조선인 사망자 숫자는 주장에 따라 수만 명이 차이가 나며 총 사망자는 20여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은 일본 천황을 호위하고, 일본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저항했다.

1945년 6월 23일 일본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이 할복 자결하면서 오키나와 전투가 끝났다.

 

 

 

 

 

 

 

 

 

 

미국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서 오키나와가 공격 목표가 됐다.

미국이 하늘과 바다를 통해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에 오키나와는 전초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리적 요건을 갖추었다.

 

 

 

미국 사이먼 버크너 중장의 지휘 아래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의 다국적 연합군이 오키나와 상륙작전 총공세를 펼친다.

미국은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 때와 마찬가지로 오키나와를 초토화하는 작전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일본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결사 항전의 총력전을 펼쳤다.

미국과 일본의 오키나와 전투(상륙작전) 중 사망한 연합군(미군)과 일본군보다 더 많이 희생된 사람이 오키나와에 살고 있던 원주민(민간인)이다.

 

 

 

 

 

 

 

 

 

일본의 오키나와 전략은 시간벌기였고, 미국의 오키나와 전투 전략은 괴멸과 초토화였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살육할 때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피아를 구별하기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다.

 

초토화 작전을 실행한 미국(연합국)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기 위해 일본군과 민간인 남녀노소의 구별은 별 의미가 없었다.

 

 

 

미군(연합군)을 포함하여 20여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은 무자비한 살육의 괴멸 작전을 벌였고,

일본군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상대방과 함께 동귀어진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와 일본군과 민간인에 대한 강요된 집단 자결(옥쇄), 그리고 집단 학살 등을 자행했다.

 

전쟁에 미친 미국과 일본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전쟁(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최초의 지상전투이며, 유일한 전투다.

비행기 폭격과 함포 사격의 지원으로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상륙작전)는 미국(연합국)과 일본이 83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연합군(미군)과 일본군, 오키나와 원주민과 조선인 강제징용(강제징집) 희생자 등 약 20여만 명이 사망했다.

 

 

육군과 해병대 등 18만여 명(지원부대까지 50여만 명)이 항공모함 40척과 1,300 ~1,500여 척의 함정에 나누어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20여만 명이 사망한 오키나와 전투를 비롯한 140개 섬 유구 열도의 전체 사망자는 수십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가 수천 리나 떨어진 일본 열도에서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강제징용과 강제징집으로 끌려간 조선인 1만여 명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죽어갔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곳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 출신의 일본군 위안부 1천여 명도 있었다.

 

 

오키나와를 비롯한 140여 개 섬으로 구성된 유구 열도(류큐 열도)로 끌려가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과 강제징집 피해자는 파악 자체가 불가능하고 단지 추정만 할 뿐이다.

 

 

 

 

 

 

 

 

 

현재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3분의 2가 넘는 미군기지가 몰려 있고,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주둔 미군 방위비의 4분의 3을 지원하고 있다.

 

 

2017년 초 개봉한 <핵소 고지>란 영화도 치열했던 오키나와 전투의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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