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일제강점기 오키나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by 도생(道生) 2017. 7. 16.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과 강제징집,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

일제에 의해 오키나와로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강제징집, 위안부 피해자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오키나와를 비롯한 140개 유구열도(류큐열도)에 끌려와 사망한 조선인 숫자는 파악이 안 된다.

 

 

오키나와(沖繩)는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류큐왕국을 강제병합하고 붙인 이름이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일본 왕은 미국의 맥아더에게 오키나와(류큐왕국, 유구열도)를 일본에서 분리하지 말고, 오키나와의 주권은 일본에 그대로 놓아둔 채 미국이 원하는 기간 동안 오키나와를 조차하는 형식으로 점령하라고 했다.

 

 

 

 

 

 

 

 

 

 

 

 

일본과 미국의 밀약으로 류큐왕국(오키나와를 비롯한 14개 섬) 국민들은 100여 년 동안 일본인으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군사적 식민지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중국과 조선, 일본 등과 수백 년 동안 교류했던 독립국 류큐왕국의 옛 영토 중 대만과 인접해 있는 섬이 무인도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다.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대한민국 평택 미군기지 시대가 열기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해외 미군기지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류큐왕국(오키나와) 원주민과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는 전쟁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오키나와에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를 군부(軍夫)라고 불렀다.

 

당시 오키나와에는 일본군이 되어 전쟁터로 끌려간 숫자가 파악되지 않은 조선인 강제징집 피해자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조선인 여성 1천여 명도 있었다.

 

 

 

 

 

 

 

 

 

 

 

 

오키나와는 덥고 습한 날씨의 아열대 기후 지역이다.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오키나와의 비행장과 격납고, 터널 포진지와 지상과 지하 진지구축 등 다양한 군사시설을 만드는데 강제동원됐다.

 

 

짐승보다 못한 차별을 받고, 굶주림과 노예와 다름없는 가혹한 노역에 시달리다 병들어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도 있었고, 자살공격대로 내몰려 사망한 사람, 집단학살과 강압적인 집단자결(옥쇄)로 사망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일제강점기 오키나와에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원인은 미군의 비행기 폭격과 함포사격, 탱크와 박격포 등 미국(연합국)이 오키나와를 초토화시킨 무자비한 공격에 의해서다.

 

 

 

 

 

 

 

 

 

 

 

 

연합군 비행기의 집중 폭격과 300만 발에 육박하는 포탄이 집중된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쟁 도구로 이용된 류큐왕국(오키나와) 원주민과 조선인 강제징용 사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비, ()의 비()2006 일본 시민단체와 오키나와 강제징용 피해자 강인창님의 주도로 건립됐다.

 

 

 

오키나와 전투는 본래 승산이 없는 전투라는 것을 일본은 알고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의 목적은 오직 일본 본토가 미국(연합국)과 일전을 불사하기 위한 시간벌기 작전, 본토 방어 작전 준비다.

 

일본은 남서 태평양 일대의 점령지를 모두 빼앗기면서 일본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병력과 오키나와 원주민(민간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강제징집했다.

 

 

 

 

 

 

 

 

 

 

 

 

일본은 미국이 진격하기 전에 오키나와를 비롯한 유구 열도의 여러 섬을 하루라도 빨리 군사 기지화해야 했다.

1945년 초부터 오키나와에 방어진지 구축 등 군사시설을 만드는 노역에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동원해 미군과의 결전을 준비하며 총력을 기울였다.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는 오키나와 비행장과 방공호를 겸한 지하사령부와 등 진지 구축, 탄약과 포탄 등 군수물자 운반에 동원되었고, 군사시설이 완공되면 기밀유지를 위해 집단 학살을 당했다고도 한다.

조선인 강제징용자 중 일부는 군무원(군속)으로 배치되어 전장의 최일선에 투입되었다.  

 

 

오키나와에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다른 곳으로 끌려간 강제징용 피해자들처럼 배급을 받지 못해 굶주림 속에서 중노동을 했고, 곡괭이와 삽을 제외한 어떤 장비도 지급되지 않아 맨손으로 비행장과 군사시설을 만들다시피 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군 전원이 옥쇄한다는 각오로 시간을 벌기 위한 전투였다.

일본 천황을 보위하고 일본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조선인과 오키나와 원주민이 총알받이로 동원되었다.

 

일본군은 비행기로 적의 군함에 돌격하여 자폭하는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와 함께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저지하는 인간 폭탄의 자살특공대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오키나와에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식량 배급을 받지 못한 가운데 가혹한 노역에 시달라다가 사료용 고구마 한 개를 훔쳐 먹다 걸려 일본 헌병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많이 맞았고, 볍씨를 훔쳐 먹었다는 이유로 집단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미국(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유구열도 중에서 가장 큰 섬인 오키나와에서 20만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1945년 4월부터 80여 일간 미국과 일본 간에 격렬하게 치러진 오키나와 전투에서만 약 1만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총알받이가 된 강제징집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피와 눈물을 흘리며 가슴속에 큰 한(恨)을 품고 죽어갔다.

 

가족과 생이별하며 머나먼 이국땅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것도 모자라, 오키나와에서 숨져간 조선인 강제징용과 강제징집 피해자들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만인의 공분을 사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