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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과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by 도생(道生) 2017. 7. 9.

미국의 일본 본토 초토화 작전 동경대공습과

도쿄대공습에 숨진 1만여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방식은 크게 3가지다.

 

조선인을 일본군과 군속(군무원)으로 강제징집하여 전쟁의 총알받이와 강제노역에 동원한 것,

조선인을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필요한 군수기지 건설과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무기 제조와 석탄 채굴 등에 필요한 남녀 인력을 강제노역시킨 강제징용, 조선인 여성을 꼬임과 협박 등으로 강제연행하여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일본군 '위안부' 등이다. 

 

 

 

1939년 일본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이 공포되기 이전인 20세부터 학업, 또는 직업을 찾아 조선인이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강제연행, 강제징용에 끌려온 조선인도 많았지만, 일본에 수년에서 수십 년 동안 직업을 갖고 정착하여 가정을 이루고 산 조선인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강제징집 또는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우리 동포가 일본에 의해 많이 희생됐다고 알려져 있다.

 

쌍방이 총부리를 겨누고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서양인이 볼 때 일본 군복을 입은 조선인이나 일본군이 모두 똑같아 보여 희생자가 발생한 경우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직접 총을 겨누고 싸우는 전선의 최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 본토 도쿄대공습 등 미국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사망한 조선인은 모두 민간인 희생자들이다.

 

조선인 강제징용자와 먹고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도일(渡日)한 조선인이 미국의 공격으로 수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의 역사는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부터 시작된다.

일본 제국주의가 1941년 12월 7일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한다.

그리고 1942년 2월 24일에는 미국 서해안 캘리포니아의 정유시설을 폭격한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일본 본토 폭격을 승인한다.

둘리틀 중령이 지휘한 80명의 미군 '둘리틀 폭격대'가 일본 본토 폭격작전을 감행했다.

 

1942년 4월 18일 미국은 항공모함 호네트호에 B-25 폭격기 16대로 하여금 일본 본토 도쿄, 오사카, 고베, 나고야 등지를 폭격했으나 그 피해는 크지 않았다.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부터 1944년 6월 마리아나 해전까지 참패하면서 일본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미국에 빼앗기면서 일본 본토 공습이 본격화된다.

 

 

일본은 패색이 짙어가던 태평양전쟁 말기 본토 대결전을 준비하며 도쿄 대본영을 나가노의 마쓰시로 대본영으로 옮기는 공사에 들어간다. 대본영(大本營)은 일본 천황이 명령을 내리는 전시체제일본군 최고 사령부다.

 

 

1944년부터 시작되었고, 1945년 3월 10일 약 8만여 명이 즉사한 미국의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으로 일본 천황과 일본군 최고 사령부, 정부 기관 등을 도쿄 대본영을 폐쇄하고 마쓰시로 대본영으로 옮기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고, 이때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약 7천여 명이 동원되어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1944년 11월부터 100여 차례의 도쿄 폭격이 이루어졌으며, 1945년 3월 10일까지 이어진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으로 총 10 수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약 5개월간 이어진 도쿄 공습에서 가장 큰 피해는 1945년 3월 10일 폭격으로 불과 3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8만 3천여 명이 사망한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이다.

 

 

 

 

미국은 폭격방식을 고고도 폭격에서 저고도 폭격으로 전략을 바꿨다.

저고도 폭격이 폭격기의 격추 위험도 크지만, 저고도 정밀 융단폭격은 군사시설과 군수공장 등을 비롯하여 그 지역 자체를 완전하게 초토화할 수 있다.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 폭격 지휘관 미국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저고도폭격으로 일본군과 민간인을 불문하고 대량살상하여 도시 자체가 완전마비 되는 치명타를 입혔다. 그의 작전은 적중했지만, 대다수 희생자가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미국이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에 사용한 폭탄은 소이탄(네이팜탄)이다.

소이탄은 폭발과 함께 순간 섭씨 3천 도의 엄청난 열을 내며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다.

 

 

 

 

 

 

 

 

 

 

 

 

340여 대의 B-29 폭격기가 2,400여 톤의 소이탄을 싣고 출격하여, 도쿄에만 약 1,600여 톤이 투하됐다.

3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도쿄의 약 30%가 불타 사라지면서 도시는 초토화됐고,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죽거나 다쳤다.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의 폭격 잔해 처리와 정리, 새카맣게 불타 거리에 널려있는 수많은 시체를 치우기 위해 일본 교도소에 복역 중인 죄수가 동원되었다.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으로 일본의 수도는 한순간에 불바다로 변했으며, 목조건물이 많았던 터라 그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고, 일본 왕궁(황실)도 큰 피해를 보았다.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도쿄대공습 당시 동경에 살고 있던 조선인은 10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발적 도일(渡日) 조선인과 강제징용 피해자 조선인을 합쳐 약 4~5만 명이 피해를 보았으며, 약 1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 사망자는 일본 군수공장, 조선소 등지에 집단수용되어 강제노역하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먹고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 모두가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과 무관한 피해자였지만, 미국의 일방적인 폭격으로 희생됐다.

 

 

 

 

 

 

 

 

 

 

 

 

미국은 도쿄대공습 이후 오사카, 나고야 고베 등지에서 차례로 대공습을 감행했으며, 가습 아픈 사실은 미국이 폭격한 곳에는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태평양 연안 국가 중 근현대사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국가는 일본과 미국 두 나라다.

아이러니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정치적인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진주만 폭격의 입안자인 겐다 미노루는 미국에서 훈장을 받았고,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 지휘관 커티스 르메이는 일본에서 각각 그들이 의미를 부여한 큰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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